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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인연’과 ‘운명’을 사색하다

‘패스트 라이브즈’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4-04-04 18:48:38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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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간결한 이야기가 때로 감정적으로 풍부하고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2023)는 그런 영화다.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은 단짝이었지만 나영 집안이 캐나다로 이민 가면서 헤어진다. 12년이 지나 뉴욕의 극작가 지망생과 서울의 공대생으로 살던 두 사람은 SNS로 서로를 찾으며 인연을 이어가는 듯하지만, 연락은 끊기고 재회는 유예된다. 낙담과 체념 속에 시간은 흐르고 각자 길을 가던 두 사람은 30대가 돼 해성이 뉴욕에 오며 마침내 조우한다. 선뜻 손잡고 다가서기엔 멀어져 버린 인연, 세월이 파놓은 간극을 응시한 채.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 공식 홈페이지 제공
남녀 간 이별과 재회를 그리지만 이 영화에는 어떠한 사건의 극적 뒤틀림도 흥분도 격정도 없다. 치정극으로 각색할 여지가 있음에도 영화는 드라마의 군더더기, 통속적 대사와 연기스타일 일체를 배제하고 절제하는 우아한 감각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심심할 법한 이야기가 종국에 형언치 못할 감동을 끌어낸다. 현실적으로 억눌러진 발화의 이면에서 우리는 어떠한 통정(通情)보다 강렬한 마음의 일렁임이 작용함을 직감하며, 일말의 기대감과 위태로운 긴장을 동시에 품고, 우정과 연정의 아슬아슬한 선을 오가는 두 남녀 관계를 지켜보게 된다.

엿보는 사람의 시선처럼 관조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며 즐거운 한때를 영원처럼 붙잡아두려는 듯한 앵글과 리듬은 ‘화양연화’(2000)의 왕가위를, 심리묘사의 농밀함은 ‘밀회’(1945)의 데이비드 린을, 비 오는 날씨와 강, 길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로 반복되는 물과 반사 이미지처럼 사물과 풍경에서 정서 효과를 끌어내는 방식은 ‘트리 오브 라이프’(2011)의 테렌스 맬릭을 상기시키는 시적 이미지즘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나영과 해성이 함께 놀던 공원의 조형물,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르막길 등, 공간 곳곳에서 발생하는 인물 사이 틈(間)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출 기조는 두 사람뿐 아니라 곁에 있어도 모종의 거리감과 질투심을 느끼며 불안해하는 미국인 남편 아서에 이르기까지, 영적으로 연결돼 있음에도 공간적으로 단절되거나, 그 반대이기도 한 인물 관계의 모순된 양상을 단적으로 함축한다.

‘미나리’(2020)나 ‘라이스보이 슬립스’(2022) 같은 일련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품과 달리 영화는 이민자가 처한 사회적 콘텍스트를 굳이 설명하진 않는다. 대신 에드워드 양이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그랬듯, 세속적 관계의 풍경을 비추며 향수와 사랑, 후회 등 다들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보편적 감정 세계를 환기하고 인간 삶의 더욱 근원적인 지점을 건드리고자 한다.

매 순간 도래하는 시간의 지도리는 잠재된 미래의 갈래를 품고 있지만, 지나쳐 보내고 회고의 눈길로 과거를 돌아보게 된 우리는 삶의 순간들을 예정돼 있던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러고는 탄식하듯 외치곤 한다. 그것은 ‘운명’이었다고.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운명에 관한 영화이다. 상실한 삶의 가능성을 애도하면서 우리는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한 줌 미소 역시 짓게 된다. 환희에 젖었던 생애의 한때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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