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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기자의 영화 人 a view] ‘정순’ 정지혜 감독

양산 어느 공장 성폭력에 무너진 중년여성 일상 그 치유의 이야기

  •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
  •  |   입력 : 2024-04-16 19:36:19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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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출신 동서대 영화과 졸업
- 사적 영상 비동의 유포라는
- 디지털 성범죄 소재를 작품화
- 사회적 편견과 현실 꼬집어
- 19개국 영화제 초청돼 8관왕

- “공장 알바하며 시나리오 구상
- 김금순 디테일한 연기에 감사
- 고향서 촬영… 지인 응원 큰 힘”

우리 사회에서 중년 여성에 대한 성범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넘어가거나 피해자 자신이 가족을 생각해 감추는 경향이 있다. 정지혜 감독의 첫 장편 영화 ‘정순’(개봉 17일)은 중년 여성에 대한 성범죄를 둘러싼 편견을 환기하고, 중년 여성의 삶과 자아를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는 영화다.

‘정순’은 공장노동자로 살던 정순이 동료 남성과 함께 촬영한 영상이 동의 없이 유포되면서 삶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리면서, 그 과정을 겪은 후 곧은 걸음으로 나아가려 하는 정순의 빛나는 내일을 응원하는 드라마다. 중년 여성이 겪는 ‘사적 영상 비동의 유포’라는 디지털 성범죄를 현실적 시각에서 담담하게 다뤄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장편 데뷔작 ‘정순’으로 정 감독은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여우주연상(김금순), 제70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신인 감독 경쟁’ 섹션 개막작 선정 등 세계 19개 영화제에서 초청받아 8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최근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만난 정 감독은 “여러모로 작은 영화라 생각했는데, 과분한 결과를 얻은 것 같다. 어리둥절하기도, 감사하기도 하다”고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데 대한 소감을 전했다. 또한 “2년 전에 ‘정순’이 여러 영화제를 돌았고, 이후 1년 동안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개봉한다고 해서 많은 분과 이야기 나누고, 관객과 만날 생각을 하니 긴장된다”는 심정을 밝혔다.

“영화를 보시면서 나와 또 나의 엄마, 혹은 주변에 가까운 분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시면서 영화를 봐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정 감독에게서 ‘정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장 아르바이트에서 시작된 ‘정순’

장편 데뷔작 ‘정순’을 연출한 경남 양산 출신의 정지혜 감독. 정 감독은 ‘정순’을 통해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한 편견을 가시화해 주목받고 있다.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정 감독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고, 동서대 영화과를 졸업한 뒤 부산에서 정진혁 촬영감독과 영화제작사 시네마루를 설립해 ‘정순’을 연출했다. 그녀는 “고교 때 영상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제가 쓴 글을 영상화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자연스럽게 영화과로 진학했다”고 했다. 이어 “대학 시절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하고 거의 1년간 식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정순과 비슷한 연령대 중년 여성들과 하루 12시간 가까이 일하면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정순’의 시작점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중년 여성의 디지털 성범죄 이야기를 떠올린 건 아니다. 이 또한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복학하고,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한 선배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단초를 찾았다. 정 감독은 “자료 조사를 하며 디지털이라는 특성 탓에 디지털 성범죄가 젊은 세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평소에 생각해왔던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디지털 성범죄라는 소재와 함께 풀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취재는 책이나 그 분야 활동가들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조사했고, 정순이 다니는 공장 환경은 자신이 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경험한 것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대학 졸업 작품을 위한 단편영화를 생각했지만 그렇게 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담기 힘들 것 같아 장편영화로 바꿔 대학 졸업 이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영상위원회에서 기획 개발 지원을 받은 것은 1년간 ‘정순’의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또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 지원 사업에 지원하려고 제작사 시네마루를 설립했고, ‘정순’은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돼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다.

■중요했던 모녀 캐스팅과 양산 촬영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무너진 일상을 살지만, 그 과정을 겪은 후 곧은 걸음으로 나아가려 하는 정순의 빛나는 내일을 응원하는 영화 ‘정순’의 스틸컷. 더 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영화 제작이 가시화되자 정 감독은 캐스팅을 진행했다. 정 감독은 “첫 번째로 생활 연기 또는 현실을 디테일하게 표현해 줄 배우분들과 작업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제가 첫 장편 연출이라서 경험 많은 배우분들과 작업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캐스팅을 앞서 원했던 두 가지 기준을 밝혔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정순 역으로 김금순을 추천받았다.

“김금순 배우님은 단편영화 ‘돌아오는 길엔’에서 처음 봤는데, ‘캐릭터의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이렇게 현실감을 뛰어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를 잘하셨다. 또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터라 정순 역도 잘 소화하실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정순의 딸이자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유진 역은 윤금선아가 맡았다. 정 감독은 “영화 ‘여름의 끝자락’, ‘이장’ 등을 통해 굉장히 특별한 힘을 지닌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유진 캐릭터를 잘 표현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제안했다”고 거침없고 능동적인 인물을 연기한 윤금선아가 적역이었음을 전했다. 정 감독은 “연출자로서 이분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며 “보편적인 인물들을 깊이감 있게 표현해 주셨고, 그래서 관객이 인물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영화 ‘정순’ 스틸컷. 더 쿱디스트리뷰션 제공
한편 ‘정순’ 촬영은 정 감독이 가장 잘 아는 도시 양산에서 진행됐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정순이 근무하는 공장도 양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정 감독은 “촬영을 2021년 1월 시작했는데, 팬데믹이 극심했던 때여서 양산의 모든 공장을 찾아가 설득했지만 섭외가 촬영 전까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부산어묵 공장에서 받아주셔서 촬영할 수 있었다”며 “가장 힘들었던 것이 공장 섭외였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촬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말에 가동을 조금 덜 하는 날에 맞춰 4회 차 만에 공장 장면 촬영을 마쳐야 했다. 고향인 양산 촬영이라 지인 찬스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은 큰 도움이 됐다. 정 감독은 “부모님이 양산에 살고 계셔서 부모님은 물론, 지인들도 많이 도와주셨다. 특히 정순의 집도 빌려주시고, 지나가다가 간식도 주고 가셨다”며 웃었다.

■‘정순’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정순’은 영화 ‘69세’, ‘갈매기’에서 보여준 중년 여성의 성범죄를 다룬다. 중년 여성이 성범죄를 겪었을 때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편견의 현실을 생생히 담고 있다. 특히 ‘사적 영상 비동의 유포’라는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한다는 차별성이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집에서는 엄마로, 공장에서는 이모로 살아가는 정순이 자신의 삶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 중년 여성의 성장 드라마로 자리매김한다.

정순의 성장은 영화 후반부에 동영상 유출 이후 정순이 아픔을 딛고 다시 공장을 찾아가 동영상 속 노래와 춤을 추는 장면과 엔딩에서 딸을 옆에 태우고 운전하는 정순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정 감독은 “정순이 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와 상황 때문에 도영과 영수를 선처하게 되는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정순이 자기를 피해자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주도권을 어떤 식으로든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싶었다”며 “공장은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이 모인 공간이고, 그 공간으로 가서 선언하는 듯한 정순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제가 운전을 못해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곤 하는데, 그러면 제가 수동적이 되고 선택 폭이 좁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순이 운전하는 것은 그 반대 의미가 되겠다. 딸이 옆에 탄 것은 정순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인물이 옆에 있으면 했다”고 모녀가 함께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느낌의 엔딩에 관해 이야기했다.

첫 장편 영화 ‘정순’으로 큰 성과를 거둔 정 감독은 차기작으로 중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 코미디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정 감독은 “지적장애를 지닌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가 주인공이고, 그가 평범치 않은 부모에게서 자란 친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구상하고 있다”는 계획을 밝혔다. 또한 “제가 부산과 양산을 떠나 거주해 본 경험이 없어서 이야기 환경이나 배경이 이 지역에 기초를 둔다”며 앞으로도 부산 경남을 거점으로 계속 영화작업을 할 예정임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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