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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같은 시대, 다른 계급 ‘격동하는 삶’

‘오키쿠와 세계’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4-04-18 18:49:55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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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쿠와 세계’(2023)의 이야기는 비어 있다. 영화는 무사 집안의 딸 키쿠(쿠로키 하루)와 폐지 장수를 하다가 거름 장수로 전업하는 츄지(칸이치로), 벌이가 시원찮은 츄지를 동업자로 끌어들이는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 세 사람의 삶이 흘러가는 광경을 미디엄숏과 와이드숏 중심의, 무심한 관조의 프레임으로 비춘다. 굳이 따지자면 키쿠와 츄지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멜로드라마가 포함돼 있긴 하지만, 인물 간 감정 표현을 간접적인 선에서 절제하는 데다 에도(오늘날 도쿄) 곳곳의 똥을 푸러 다니는 야스케와 츄지 두 사람, 만나는 접점이 드문드문한 키쿠의 삶을 번갈아 비추는 분열적인 편집은 영화를 전적으로 사랑을 다루는 통속극과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일본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영화 ‘오키쿠의 세계’(2023) 한 장면.
영화의 속뜻은 군데군데 비추는 시각적 은유와 배경 삼는 시대상에 감춰져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공중화장실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하면서 키쿠와 츄지, 야스케 세 사람이 한데 모이게 되는 도입부는 주제를 함축한다. 빈민가 공동주택에 머물며 테라코야(寺子屋 : 절에 딸린 일본식 서당)에서 아이들 글공부를 지도하지만, 명색이 무사 집안의 딸임에도 키쿠는 폐지 수거로 안면을 텄으리라 짐작되는 츄지에겐 호감을 표시한다.

평민의 자식도 교육을 받고, 계급이 다른 사람 간에도 은근하게 연정이 피어오를 수 있다. 쏟아지는 빗줄기로 표상되는 시대 격동(激動)은 제각기 직업과 신분, 살아가는 ‘세계’(せかい)가 달라 한데 엮일 일이 없는 사람들이 같은 지평에 서게 만든다. 1858년에서 1861년까지, 시간이 경과함을 알리는 자막은 세 주인공의 삶이 흐르는 동안 영화가 비추는 공간의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은연중에 상기시킨다. 흑선 내항(1853년)과 메이지 유신(1867년) 사이. 1858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안세이 대옥 사건) 피바람이 불어닥쳤고, 1860년에는 안세이 대옥을 주도한 막부의 중역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사쿠라다몬 밖의 변)당하는 등, 막부 말기 대혼란이 격화된다.

찻잔 속 물처럼 고요하고 담담한 일상의 이면에선 격렬한 폭풍이 밀어닥치고, 개인의 미시적 삶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과 분리될 수 없다. 키쿠의 아버지가 원래 자리에서 쫓겨나고 살해당하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무사 중심 신분제 사회, 쇄국(鎖國) 체제가 붕괴하는 전환기의 혼란한 정세와 연관돼 있음이 암시된다.

폭우의 하강과 그로 인해 바닥에서 떠오르는 분뇨의 상승이 엇갈리는 동선 설계는 구시대 사무라이 질서의 몰락과 다가오는 사민평등(四民平等), 평범한 사람들의 신시대가 교차하는 영화의 구도 그 자체이다. 처음에는 자신들에게 가해지던 차별과 억압을 순순히 받아들이던 츄지와 야스케는 점점 대등한 위치에 서서 주변 인물들에 맞서게 된다. 츄지와 오키쿠의 진전되는 관계도 이처럼 신분제가 해체되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삶의 미세한 영역에서 시대 변화는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언덕 위의 구름’에서 ‘모두가 ‘국민’이 되었다’(誰もが「国民」になった。)라 쓴 바 있다. ‘오키쿠와 세계’는 그 문장에 화답하는 영화이다. 낡은 질서의 굴레에 매여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대, ‘근대성’은 어떻게 다가왔는지, 영화는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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