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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사회주의 신랄히 비판한 ‘악령’…그에 압도당한 나림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7> 상처와 고통에 대한 공감: 도스토옙스키 ②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4-06-09 19:22:24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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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사 탈퇴하려던 동지 죽인
- 네차예프 사건 영향받아 집필
- 무신론자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 도덕적 악·정치적 허무주의 등
- 혁명의 형이상학 탐구한 책

- 독서록 촘촘히 쓰던 나림도
- ‘악령’ 읽고선 한 문장도 못 써
- 결사·집회에 대한 공포 느끼곤
- 조직 제안 일단 거절하고 말아

누구에게나 한 권의 책이 있다.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단 한 권의 책이 있다. 나림 이병주에겐 그 한 권의 책이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다. “20세 여름에 하숙방의 커튼을 치고 밤을 새워 읽은 이후 평생 그 주박(呪縛)에서 풀려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청년 시절에 희귀한 인물을 만났거나 희귀한 책을 읽은 경험이 있다면 좀처럼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제작 ‘악령’은 영상으로 여러 차례 옮겨졌다. 그중 2014년 UAE 브라질 독일 등이 합작해 ‘Besy’라는 제목으로 제작한 것으로 나오는 드라마 한 장면.
‘악령’은 도스토옙스키가 악이란 수수께끼 앞에서 분통을 터뜨린 격노(激怒)의 서(書)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니힐리스틱한 청년 세대의 어쭙잖은 혁명놀음에 분노를 느꼈다. 여기서 니힐리스틱하다는 것은 무신론적인 사이비 사회주의를 뜻한다. ‘악령’은 그들이 주장하는 혁명의 형이상학을 탐구한 책이다.

■짙은 안개, 무서운 수렁, 피로감

나림이 읽은 ‘악령’은 요네가와 마사오가 번역한 이와나미 문고본이었다. 이와나미 문고는 교양과 계몽주의의 첨병이었다. 국내외 학술서적과 고전문학 작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출판하여 많은 독자가 쉽고 폭넓게 읽을 수 있게 기획한 일본 최초 문고판이다.

나림은 원서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서양의 학문과 예술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격이 원서의 10분의 1이면 족하다는 면에서 일본의 지적 에너지 생산에 이와나미 문고가 기여한 공적이 한량없다고 상찬했다.

원서로 읽는 사람은 ‘이와나미 문화인’이란 멸칭으로 야유하기도 했으나 모든 언어를 골고루 독해하는 사람은 없으니 일본의 문화인 대부분은 ‘이와나미 문화인’의 범주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번역도 명역(名譯)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970년대 우리 출판계도 문고본이 크게 유행했다. 60대-70대 독서인이라면 서가에 삼중당 문고, 삼성 문고, 박영 문고, 정음 문고 등에서 출판한 아담한 책이 다소 낡고 바랜 채 더러 꽂혀있을 것이다. 서문 문고의 경우 이와나미 문고처럼 별 개수로 가격을 책정하기도 했다. 내 책꽂이엔 1972년 3월에 출간된 서문 문고 ‘킬리만자로의 눈’ 초판이 있다. 별 하나에 70원이라고 쓰여 있고 별이 4개 그려져 있다.

나림은 책을 클로즈 리딩(close reading)했다. 꼼꼼히 읽고 나서 독서록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방향도 목적도 없는 청춘이 기껏 자기에게 충실해 보고자 한 유일한 작업이자 유일한 보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몇 박스 되는 독서록 공책을 6·25 전란 때 잃고 허탈했다고도 했다.

그런데 ‘악령’을 읽고는 감상을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 무서운 수렁을 건넜다는 피로감이 있었다. 강렬한 감동을 문장으로 만들어 보려 애썼으나 단서조차 잡을 수 없었다. 얕은 견식으로 재단하기엔 인생과 사회는 너무나 엄청난 심연이란 느낌이 든 탓이다.

다만 언행에서 선명한 변화가 생겼다. 누구든 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면 논리의 정당성이나 정열의 순수성을 따지기 앞서 일단 사양부터 하고 마는 것이다. ‘악령’에서 느낀 리얼리티 때문이다. 나림은 ‘악령’에서 결사와 집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도스토옙스키는 네차예프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네차예프와 몇 명 공범자가 이념에 동조하지 않아 결사를 탈퇴하겠다는 동지를 모스크바의 공원에서 살해하고 연못에 유기한 사건은 도스토옙스키를 격발시켰다.
구글에서 ‘악령’을 영문 제목으로 검색했을 때 뜨는 수많은 판본이다.
■사회주의가 무한 전제주의가 되는 운명

우선,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일이 허용된다”는 상황을 혐오한다. 인간 마음속에 선악을 결정하는 최고 규범이 없다면, 즉 양심이 없거나 또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못 할 일이 없어진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불문하는 자들이 생사여탈권을 갖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원래 집단이란 안으로는 동질성, 밖으로는 배타성을 띤다. 안의 동질성이 강해질수록 밖의 배타성도 강해지기 마련이고, 동질성을 견지하기 위해선 내부의 적에게도 얼마든지 가혹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 악과 정치적 허무주의는 동일 선상에 있다.

네차예프
다음, 도스토옙스키는 무한 자유에서 출발해 무한 전제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의 아이러니를 비판한다. 혁명을 주장하는 정신의 허위를 까발려 결국은 비인격화로 간다고 경고한다. ‘화려한 약속, 우울한 성과’를 예고했고, 천국을 약속했으나 지옥을 보여준 사회주의 혁명의 끝을 내다봤다. 레닌의 혁명 후 ‘악령’은 금서로 분류되고 가족은 핍박받았다. 나림은 도스토옙스키를 반동이라고 하는 공산당적 사고에 승복할 수 없었다.

나림은 “베토벤이 그 전의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천재였으나 교향곡 9번으로 신이 되었다”는 필법을 따라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 ‘백치’로 충분히 천재였다. 그런데 ‘악령’에 이르러 신이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신은 전지전능의 뜻이라기보다 신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나림이 ‘악령’을 읽고 감상문을 쓰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산술 지식밖에 없는 사람에게 고등수학의 문제를 안겨 놓은 것이다.

‘죄와 벌’이 제시한 문제도 엄중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와 함께 고민할 수도 있고 공범이 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혐오하고 말 수도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범한 사람에겐 법을 넘어설 권리가 있으며, 전당포 노파 같은 장애물을 제거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람이 영웅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막상 저지르고 나니 자신은 영웅 자질이 없는 평범한 사람임을 자각하고 자책한다.

■나림이 울었던 그 밤

‘죄와 벌’은 일상적인 레벨로 웬만하면 이해가 되는 산술 문제다. 그런데 ‘악령’의 스타브로긴은 병리의 에너지가 생리를 압도한 이해하기 힘든 유형이다. 문화와 개성이 기괴하게 뒤섞여 암의 형태로 변종된 모습이다. 스타브로긴은 라스콜리니코프가 묘하게 발전한 단계이나, 분명 리얼리티다. “모든 일이 허용된다”고 믿고 행동하는데 그 악의 전염성이 강하다.

스타브로긴은 매력적인 용모와 호인다운 사교술, 귀족 출신이란 배경에 경제적 여력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다. 그런 조건이지만 타고난 음험함과 데모니슈(demonish·악령이 깃든)한 인성에다 병든 문명의 독을 마시고 허무에 빠져 선악 기준도 없어지고 가치 자체를 상실해 버린다. 그런 허무라면 어떤 범죄도 다 가능하다. 그는 지성과 달변으로 주변 사람을 가스라이팅하며, 자기기만이 끝없이 연속되는 삶을 산다. ‘악령’의 묘사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가면을 닮았다고 했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고등수학의 문제를 일상의 평면으로 끌어내려 산술적 의식으로 견문하게 해 주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함을 수학에 견준 이유가 있다. 나림은 수학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수학에 일가견이 있었다. ‘지리산’의 이규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주는 걸 계기로 일본 여학생과 연애를 하고, ‘행복어사전’의 서재필은 아내 앞에서 처남이 힘들어하는 수학 과제를 해소해 주고 으쓱한다. 중년의 나림은 소설 작업을 하다가 여의치 않을 때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으로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1941년 일토강습회에서 수학 강의를 듣던 시절, 이와나미 신서 ‘소피아 코바레프스카야의 회상’을 기다렸다가 발행 첫날 샀다. 소피아는 문학 소양이 풍부한 수학자로 독일에 유학해 최초 여성 수학박사가 된 인물이다. 다방 한구석에서 단숨에 그 책을 읽은 나림은 소피아의 언니 안나를 찾아온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비통한 감정이 일어 눈물을 흘렸다. 수학이 좋아 읽은 수학자의 회상기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도스토옙스키가 망신당하는 모습은 나림을 슬프게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구애했으나 거절당했다.

다방 ‘니농’의 마담은 핸섬하고 지적 느낌의 청년이 울고 있는 모습을 위로하다가 그날 밤 술집에서 술을 사주기도 했다. 나림은 차마 그 책을 읽고 울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림에겐 로맨틱한 사건이 참 많다. 사람은 로맨틱해야 로맨스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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