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나라서 영화화된 작품
- 한국사회 투영해 리메이크
- 윤리적 신념이 붕괴하는 순간
- 그 이중적 선택의 과정에 천착
- 20년 인연 설경구와 첫 작품
- 냉철함 속 ‘강철중’ 느낌도 나
- 김희애는 오래 좋아한 배우
- 신인같은 태도와 겸손함 놀라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덕혜옹주’ ‘천문: 하늘에 묻는다’ 등을 통해 인간 심리를 다루는 섬세한 연출과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인정받은 허진호 감독이 인간 내면을 그리는 영화 ‘보통의 가족’으로 5년 만에 돌아왔다.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베스트셀러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네덜란드 이탈리아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영화화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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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통의 가족’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 그는 자녀의 문제 앞에서 이중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갈등하는 형제 부부의 모습을 섬세한 연출로 그려냈다. 하이브미디어코프·마인드마크 제공 |
‘보통의 가족’은 형제지만 다른 가치관을 가진 변호사 재완(설경구)-의사 재규(장동건)가 자녀들의 범죄 현장이 담긴 CCTV와 마주하며 드러나는 이중적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자녀의 범죄를 알게 됐을 때 재완은 감추려 하고, 재규는 자수하려 하지만 피해자가 사망하자 두 형제가 가치관 변화를 보이는 과정이 극적으로 표현된다. 특히 관객에게 ‘내가 저들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타인에게는 법·양심·도덕의 가치관을 보이지만 가족, 특히 자녀가 결부됐을 때 취하게 되는 이중적 잣대를 돌아보게 한다.
원작 ‘더 디너’가 여러 나라에서 계속 영화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모두가 공감할 만한 정서를 담으면서도 각 나라 정서를 반영할 여지가 있음을 뜻한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허 감독은 “다른 나라에서 영화화됐다는 건 분명 부담이었지만 이 이야기를 현재 한국 사회로 갖고 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에게서 ‘보통의 가족’에서 들려주려고 했던 것, 설경구 장동건 김희애 수현과의 작업 등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인간의 양면적 모습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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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가족’ 한 장면. 하이브미디어코프·마인드마크 제공 |
허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인간 내면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 많았다. 극악한 악인이 등장하거나 선과 악의 이분법 시선으로 인물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데 ‘웰메이드 서스펜스 영화’라고 홍보하는 ‘보통의 가족’은 이전 영화들과 결이 좀 달랐다. 이미 영화화돼 널리 알려진 작품을 다시 영화화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처음 ‘보통의 가족’ 대본을 받고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원작 소설을 읽고 다른 나라에서 만든 영화를 보며 좀 망설였다. 모든 감독이 그렇지만 어쨌든 한 번 영화화된 작품을 다시 영화화하는 건 부담이 된다. 계속 고민하다가 어떤 사람의 양면적인 모습은 이제까지 잘 다루지 않았고, 저 또한 아이가 있기에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그렇듯 ‘보통의 가족’의 주인공들처럼 자녀 문제 앞에서는 이중 선택의 기로에 서고, 가치관 충돌로 갈등하게 된다. 허 감독은 이를 보여주려 노력했다. “자기가 믿었던 도덕·윤리 신념이 허물어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 행복한 가정에서 생긴 자녀 문제가 이들을 어떻게 흔들어 놓는지가 흥미로웠다.” 이에 연출 의도를 선명히 보여주기 위해 제목도 원작의 ‘더 디너’가 아닌 ‘보통의 가족’으로 바꿨다.
“촬영할 때까지는 ‘더 디너’라는 제목을 가지고 갔다. 그런데 ‘더 디너’가 영어 제목이고, 뭔가 불편했다. 그렇다고 ‘저녁 식사’라고 할 수도 없고. 제목에 반어적인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고, 여러 후보 중 여러 의미를 지닌 ‘보통의 가족’이 가장 좋았다.”
또한 자녀 대학 진학을 위해 강남으로 전학을 온다거나 치매가 있는 노모를 요양원에 모시려고 하고, 재벌 2세 변호를 맡아야 하는 한국적 상황을 가미해 관객에게 더 밀착되도록 했다.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가족·교육적인 현실을 녹이려 했다. 또 경제적인 이익을 좇는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동생 부부가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려고 하고, 경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형 부부 이야기를 대비시킨 것은 이전 작품들과 결이 다르다.”
■적역 캐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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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메이드 서스펜스 영화 ‘보통의 가족’. 하이브미디어코프·마인드마크 제공 |
‘보통의 가족’은 허 감독 영화답게 배우의 연기 앙상블이 돋보인다. 형 부부를 맡은 설경구와 수현, 동생 부부 장동건과 김희애의 연기는 허 감독 특유의 배우에게 맡기는 연출 스타일과 어울리며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형 재완 역 설경구는 허 감독과 20여 년을 가깝게 알고 지냈지만 한 번도 작품의 연이 없었다. “일본에서 한국영화제 비슷한 것이 있어서 저는 ‘8월의 크리스마스’, 설경구 배우는 ‘박하사탕’으로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만났다. 둘 다 영화제에 낯설었고, 그 느낌 때문인지 딱 맞아서 술을 꽤 마시며 친해졌다. 이후 같이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질 않더라. 이번에 시기가 잘 맞았다. 설경구 배우가 재완 이미지와 뭔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냉철한 느낌이 있고, ‘공공의 적’ 강철중 같은 이미지도 있었다.”
설경구는 극의 중심은 물론, 현장 분위기까지 이끌며 영화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생 재규 역 장동건과는 영화 ‘위험한 관계’ 이후 1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장동건 배우와는 ‘위험한 관계’를 하며 중국에서 오래 같이 있었다. 재규는 보기에 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장동건 배우가 떠올랐다. 그가 강한 연기도 많이 했는데 이런 연기는 처음인 것 같더라. 연기에 대해 고민할 때 ‘동건 씨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장동건은 영화 초중반까지 실제 자신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 연기를 펼친다.
재규의 아내인 연경 역 김희애는 군대에 있을 때 사물함에 브로마이드가 있을 정도로 허 감독이 좋아하는 배우다. “김희애 배우는 제가 영화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굉장히 좋아했다. 경험이 정말 많으신 분인데, 너무 겸손해서 놀랐다. 목소리만 출연하는 촬영이어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데도 우는 장면에서 실제로 울더라. 감정 연기는 그렇게 계속할 수가 없는데 그걸 계속하니 연출자로서 감탄했다. 행복한 부부 모습을 보여줄 때는 애교도 막 부리며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에요’라고 하더라.”
마치 신인처럼 촬영에 임한 김희애 덕분에 다른 배우들도 함께 힘을 냈다.
‘보통의 가족’의 히든카드이자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인물이 재완의 아내 지수를 연기한 수현이다. “수현 배우는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몇 번 봤는데 실제 만났을 때 그늘 없고 밝은 느낌이 좋았다. 지수는 나이 많은 돌싱 남자와 결혼한 인물이어서 네 명 사이에서 이질적 존재가 될 수 있는데, 이들 대화에 툭툭 끼어들면서 ‘지수만 제일 정상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선배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잘 표현했다.” 나이 어린 형수이자 손위 동서인 수현으로 인해 벌어지는 재미있는 상황은 긴장이 감도는 영화에 웃음을 주는 포인트가 된다.
한편 형제 부부의 저녁 식사 장면은 영화에서 세 차례 등장하며, 장면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 식사 자리가 될 뿐만 아니라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인물들의 가치관 변화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이다.
“첫 번째 식사 장면은 인물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머가 조금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장면은 아이들의 사건을 알고 나서다. 이들이 지닌 신념이나 윤리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건에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하려는지 보여주려 했다. 또 진지하기보다는 소동극처럼 그리려 했다. 세 번째 식사 장면에서는 네 명의 본 모습이 나오면서 감정이 부딪친다. 또 다른 진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 정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식사 장면은 많은 리허설을 했고, 이 장면들만 모아 공연해도 될 만큼 잘 짜인 연극 무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받은 ‘보통의 가족’은 그에 앞서 토론토국제영화제, 우디네극동영화제를 비롯해 전 세계 영화제에 19회나 초청받았다. “영화가 토론토에서 처음 공개되고 나서 박찬욱 감독에게tj ‘평이 좋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실제로 평을 받아보니 진짜로 나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또 이탈리아 출신 프로그래머에게 이탈리아에서도 영화로 만들었는데 ‘보통의 가족’을 왜 초청했느냐고 물었더니 ‘너의 영화가 훨씬 재미있다’고 하더라.(웃음)”
허 감독의 말대로 ‘보통의 가족’은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의 다양성에 힘을 보탤 상업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