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말선초 시대 고려 충신 상징
- 명나라 황제 주원장 두 번 만난
- 역량·배포 가진 최고 인물 묘사
- 사람 간 정 소중히 여겼던 나림
- 둔촌 이집과 우정 담담히 그려
나림 이병주는 역사소설을 많이 썼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역사 문학관의 발로다. 나림은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도 했다. 달빛에 물들인다는 건 문학을 통해 역사의 패자에게 해명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이다. 역사가 냉철한 평가라면, 문학은 따뜻한 관용이다. 역사가 책임 있게 답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애틋한 심정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나림은 최영 장군 사례를 들며 “죄가 공을 넘으면 인정이 품어줘야 한다”고 했다.
나림은 여말선초 역사와 인물에 각별히 관심이 많았다. 특히 포은 정몽주에 대한 존경의 념이 지극하다. “포은 선생 56년 생애는 성(誠)과 충(忠)과 정(情)과 지(智)와 근(勤)이 그야말로 간연(間然)할 수 없는 밀도로 짜여진 시간의 연속이었다”는 ‘정몽주’ 후기가 바로 그 뜻이다. 여말선초(麗末鮮初)는 혁명의 시대였다. 475년을 지탱하던 왕조가 막을 내리는 절체절명 시대였다.
정몽주의 죽음은 바로 고려의 종언을 뜻했다. 포은은 고려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상징이다. 회광반조는 회생이 아닌 아주 짧은 마지막 불꽃이다. 포은이 더 없는 괴력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망국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림은 “대들보가 썩어가는데 몇 장 부서지는 기왓장 걱정”으로 될 일이 아니니, “포은은 도도한 탁류를 조그마한 떼배 타고 건너는 심경”이었다고 했다. 결국 포은도 “힘에 겨운 일을 무리하게 하다 좌절한 인물”이다. 나림이 이성계나 이방원 또는 이색이 아닌 정몽주에 주목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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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천시 포은로에 자리한 임고서원 전경으로, 서원 앞에 포은 선생이 절명한 개성 선죽교를 재현해 놓았다. |
■유기(劉基)를 불러 포은을 돕다포은 정몽주는 외교관으로서 역량과 배포가 당대 최고였다. 갓 개국한 명 황제 주원장을 두 번 만났다. 주원장은 잔인함과 너그러움 양극단을 다 가진 절대 권력자다. 의심·변덕이 심해 엄혹하고 집요한 숙청이 재위 내내 이어졌다. 12년에 걸쳐 공신 3만 명을 처형했다. 출신 컴플렉스 탓이 크다. 주원장은 걸승(乞僧) 출신으로, 홍건적 무리에서 기반을 다졌다. 그가 광(光)과 독(禿)이란 글자에 민감하고 칙(則)과 도(道) 자도 싫어하는 이유가 모두 탁발승이나 홍건적 흔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광과 독은 머리 깎은 중, 칙과 도는 도적 적(賊)·도(盜)와 음이 같다고 금기어가 됐다. 이 글자들을 기휘(忌諱)하지 않고 문장에 썼다가 문자옥(文字獄)으로 비명 참사한 문사가 한둘이 아니다.
역대 중국 개국 황제는 두 부류다. 하나는 지방 호족이고 다른 하나는 건달이다. 호족 출신으로 개국한 경우가 수 문제와 당 이연·이세민 부자 송 조광윤 등이고, 건달 출신 대표는 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이다. 영웅(英雄)은 머리 좋고 배포 큰 건달을 뜻한다. 청 고증학 대가이자 시인인 조익은 주원장을 “성현의 성품, 호걸의 기풍, 도적의 면모를 동시에 가진 인물”이라고 품인(品人)했다.
성성(聖性)과 마성(魔性) 겸비의 황제에게 올릴 하표(賀表)를 작성해야 하는 서장관 정몽주에게 뜻밖의 조력자가 나타난다. 주원장이 유일하게 의심하지 않는 개국 공신 유기(劉基)다. 물론 이 대목은 나림의 상상이다. 당대 초일류 인물들의 멋스러운 교유는 꾸밈이라도 향기롭다. 유기는 제갈량에 버금가는 책사이고, 명초(明初) 유학 대표 학자이며, 천문 지리 기문둔갑에도 통달한 기인이다. 그의 명리(命理) 저술 ‘적천수(滴天髓)’는 지금도 텍스트로 읽힌다. 명나라 수명 274년과 500여 년 뒤 터질 신해혁명을 예견하는 등 과거 500년 미래 500년을 통시(通視)했던 인물로, 전설적 일화가 많다. 유기는 난징에 도읍한 주원장의 명으로 항저우에 은신하며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을 만나 출사를 권유한 일도 있다. 두 기인의 고담준론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나관중의 제갈량 묘사엔 유기의 모습이 상당하다는 해석도 있다. 포은은 유기의 호의로 무사히 사신 임무를 완수하지만, 귀국 길 풍랑으로 사경에 이른다. 구사일생 후 포은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 왜구 문제를 해결한다. 왜구 문제를 상행위 즉, 비즈니스로 접근해 풀어가는 포은의 역량이 일품이다. 포은은 대체 불가의 외교관이었다.
■포은, 큰 인물 |
| 뛰어난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을 그린 조선 시대 영정. |
포은은 학자로도 당대 최고였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강의를 방청(傍聽)한 목은 이색은 포은을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 천거할 만하다”고 칭송했다. 정치가로서는 좌절했지만, 포은의 학맥은 조선조로 이어진다. 포은의 학문은 야은 길재와 변계량을 거쳐 김숙자와 아들 김종직에게로 전해진다.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 다시 조광조로 이어진다. 포은이 조선조에 와서 충절의 상징으로 예우받은 것은 역시 빛나는 제자들의 덕도 크지만, 왕권이 안정되면 혁명가 정도전보다 충의로운 정몽주가 더 절실해지는 연유도 있다. 조선 개국 이데올로그는 폄하하고, 개국의 최대 방해자는 존숭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치가로서 포은이 실패한 이유는 각박한 시대에 각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림은 “포은이 대범 융통했으나 그건 난세의 중심인물이 취할 태도는 아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생결단 대목에서 끝까지 절충하고 포용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몽주 제거를 간언하는 이방원에게 이성계는 “목은과 포은이 민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포은을 우리 편으로 하면 천인력(天人力)이고, 적으로 돌리면 만인력(萬人力)이다”며 끝까지 동행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충의의 상징이다. 비록 이미 이념으로서 충일 뿐이고 용렬한 임금에 대한 인격적 충성에선 멀리 떠나 있었지만, 자기부정을 할 수는 없었다.
당시 정계는 세 세력이 각축하는 구도였다. 이색으로 대표되는 보수파,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혁명파, 정몽주의 중도파다. 포은은 이색을 “완고한 게 아니다. 심약해서 결단을 못 하는 것이다. 난세엔 서투른 결단보다는 심약함이 차라리 낫다. 서투른 결단은 사람을 죽이지만 심약은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며 이해했다.
포은에게 정도전은 공통점이 많은 친구였다. 성균관 박사 시절 함께 학문에 정진한 동도(同道)다. 제자가 많이 따르고 늘 주위에 사람이 넘치며 관도(官途)에서도 성큼 앞서가는 포은에게 삼봉은 라이벌 의식을 가졌을 수 있으나 포은은 특유의 온화함과 대범함으로 품었다. 정도전은 매사 주도면밀하고 원려(遠慮)가 있었다. 다만 과격한 강골로, 귀양도 오래 살고 재야 생활도 길었다. 개혁과 혁명을 둔 건곤일척 상황에서 포은은 “야심이 성하면 악성이 드러난다. 악성이 세지면 독성이 된다”며 혁명파의 야심을 통제하려 했으나, 치명적인 역습을 당한다.
■주문 제작한 사연‘정몽주’는 나림이 주문 생산한 작품이다. 숱한 연재소설 등 나림 작품은 대부분 주문 제작한 것이지만, ‘정몽주’는 유독 주문자 이름이 초판본에 명시됐다. 영일 정씨 문중이 주문했고, 문중 좌장 정해영이 감수했다. 나림 작품으로는 다소 건조하고 싱겁다. 나림 소설의 한 특장(特長)인 ‘사랑과 사상의 거리재기’에서 사상만 있고 사랑이 없는 허전함이 있다. ‘허균’의 에로티시즘도 없고, ‘정도전’의 로맨스도 없으며, ‘천명’ 같은 활달함도 덜 하다.
그럼에도 포은의 호방한 주품(酒品)과 너른 교유는 근사하다. 우정을 중시한 나림은 “정이 제일이다. 인정을 소중히 해야 한다”며 포은과 둔촌 이집의 우정을 담담히 묘사한다. 이집은 문장과 지조로 일찍이 이름이 난 인물이다. 신돈의 방자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화를 입게 되자 부친을 업고 야반도주했다. 신돈 몰락 뒤 조정에 돌아왔으나 뜻을 접고 낙향했다. 몸은 관직에 있으나 마음으론 둔세(遁世)도 소망해 보는 포은은 이집이 마냥 부럽다. 포은과 둔춘은 망년지교(忘年之交)다. 두 사람 다 노소동락 한다. 노(老)는 소(少)의 용기를 배우고 소는 노의 사려를 배워 절차탁마함이 수양의 요체임을 안다. 대배(大杯)로 수작(酬酌)하며, 염리세속(厭離世俗) 할 수 없는 대정치가 정몽주의 숙명을 이야기하는 둔촌의 위안과 격려가 따듯하다.
세상에 아무리 잘난 사람도 친구가 필요하다. 적아(敵我)가 첨예한 난세일수록 더욱 그렇다. 포은과 나림 모두 정을 소중히 했고 외우(畏友)와 집우(執友)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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