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淸溪川)은 서울 도심 한복판을 지나는 물길로, 서울의 도시 개발 역사를 상징하는 하천이다. 2003년부터 물길 위를 덮고 지나는 청계고가를 허물고 하천의 정비·복원이 이루어진 청계천 복원 사업에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주목하고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청계천은 세계인이 찾는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아 벌써 내년이면 개장 20주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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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시대 개천의 준천(濬川) 과정을 기록한 화첩 ‘어전준천제명첩’. 부산박물관 제공 |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 조선판 청계천 프로젝트가 있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까지 개천(開川)이라 불렸는데 제대로 된 치수 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큰비가 내리면 범람, 인근 행랑과 민가가 피해를 보기 일쑤였다.
부산박물관 소장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은 영조 재위 36년인 1760년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간에 걸쳐 21만여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실시한 개천의 준천(濬川: 물이 잘 흐르도록 하천을 파서 정비함)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기념하여 남긴 기록 화첩이다. 모두 28면으로, 자신의 행적과 공사에 참가한 공로자들의 공을 치하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영조와 신하들이 지은 시가 함께 들어 있다. 그 안에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는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들이 일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거의 유일한 그림으로, 준천 공역이 한창이던 3월 10일 개천에 있던 두 개의 수문 중 오간수문(五間水門) 위에 영조가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살펴본 사실을 묘사했다.
그림의 상단 성벽에 몸소 나온 영조와 관원들을, 그리고 오간수문 아래에는 인물과 수목, 누각들을 배치했다. 굳게 닫힌 다섯 개 칸의 수문 아래에 드러난 개천 바닥에는 일꾼들이 소의 힘을 빌려 흙을 퍼내고 있거나,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가래질을 하고 있으며 행사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개천 양안에 서서 구경하는 모습, 음식 소반을 앞에 두고 앉아 있거나 음식을 나르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에는 어좌(御座:왕이 앉는 자리)만 있고 영조는 그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어진(御眞) 이외에는 그림에 왕을 그리지 않는다는 당시 예법에 따른 것이다.
영조는 80세에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평가하면서 탕평(蕩平), 균역(均役)에 이어 준천을 세 번째 업적으로 꼽았다. 영조는 1752년부터 백성을 아홉 차례나 직접 만나 준천의 필요성을 알린 후에야 준천 공역에 착수했을 만큼 영조의 청계천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끝까지 백성과 소통하며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영조의 명에 따라 1760년 준천 사업 내용과 그 결과를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에는 “개천의 준설은 첫째도 백성을 위함이요, 둘째도 백성을 위함이니”라 하여 그 뜻이 잘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