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아이가 글씨 쓰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곧 중학생이 될 아이인데, 무슨 글자를 쓴 것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시험 답안지에 주관식으로 답을 쓰는 문제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글자를 못 알아봐서 오답 처리된 적도 있단다. 아이는 태평했다. 장차 모든 분야가 디지털 세계가 될 텐데, 손 글씨를 쓸 일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긴 스마트폰으로 짧은 문자와 긴 사연 보내기, 문서 작성해서 메일 보내기, 일정 관리 등 못할 일이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손으로 글자 하나 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가끔은 기괴하다는 생각도 든다.
날이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교육 현장에서 교사도 학생도 더 이상 글씨 쓸 일이 없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 해도 손 글씨는 여전히 힘이 있다. 예쁜 손 글씨 공모전 개최는 해마다 이어지고, 필기구는 계속 만들어진다. 필사가 목적인지, 이렇게 해서라도 뭔가를 읽어야 한다는 게 목적인지 알 수 없지만, 좋은 글을 필사해 보라고 권하는 책도 끊임없이 출간된다. 시 소설 문장 한자 영어 다양한 명언과 명구…. 분야도 다양하다.
필사는 ‘읽기’와 ‘쓰기’를 동시에 할 수 있다. 물론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문장을 베껴 쓰는 것이지만, 어쨌든 집중력을 향상하고 뇌를 자극하는 활동이다. 거듭해 쓰는 동안 필체가 좋아진다면 그것도 반가운 일이다. 최근 눈에 뜨이는 필사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시로 채우는 내 마음 필사노트’(황인찬 외 지음/창비). 그리움 사랑 휴식 위로 등 다양한 감정에 맞춤한 100가지 시구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10부로 구성했다. 독자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 쓸 수도 있고, 필요에 따라 원하는 주제부터 필사해 볼 수도 있다. 故 신경림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나희덕 진은영 등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거장의 시와 이장욱, 이병률, 신용목, 안미옥, 안희연, 황인찬 등 요즘 독자들이 열렬하게 호응하는 시인의 작품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것 또한 이 책의 장점이다.
‘철학자의 공책’(최진석 지음/궁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본 가운데 기본은 나 자신을 궁금해하는 일이라고 전하는 기본학교 교장, 노자·장자 연구자, 철학자 최진석의 문장과 함께하는 300일의 필사책이다.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필사를 하며 ‘나’에게로 건너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다.
‘마음에 힘이 되는 하루 한 문장 영어 필사’(위혜정 지음/센시오). 하루 5분씩, 하루 한 문장 시간을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힘이 되는 아름다운 명문장을 담은 영어 필사 책이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리처드 바크 ‘갈매기의 꿈’ 등 29권의 명저, 69인의 명언, 8개의 명작 영화에서 발췌한 주옥같은 명문장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