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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태백산맥’ 넘었다…전후 민족 고민 꿰뚫은 통찰력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28> ‘지리산’② 이병주와 ‘지리산’ 인사이트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4-13 19:23:07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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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 소설’ 효시는 나림 작품
- 인사이트·리얼리티 더 높은 내공
- 자기 각성·성찰까지 담아내 압권

- 조선공산당 놀음에 희생된 벗들
- 억하심정으로 10년의 서사 집필
- 선거 땐 빨치산이란 공격받기도

나림 이병주의 ‘지리산’은 빨치산 소설의 효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가장 많이 읽힌 빨치산 소설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지난달 하동 이병주 문학관에서 특강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도 문사 한 분이 어느 작품이 먼저이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질의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두 가지 면에서 ‘지리산’과 ‘태백산맥’은 아예 비교가 안 된다. 인사이트와 리얼리티의 차이가 워낙 크다. 원조와 에피고넨(아류 亞流)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원조가 다소 투박하고 에피고넨이 화려 현란하다 해도 내공의 차이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에는 6·25전쟁 시기 군·경이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는 전투 모형이 전시돼 있다. 국제신문 DB
■‘지리산’과 ‘태백산맥’

두 작품이 의분(義憤)으로 썼다는 공통점은 있다. 물론 의분의 방향과 색깔은 상당히 다르다. 집필 중 외부의 압박을 받았다는 점도 같다. 1972년부터 5년 동안 ‘지리산’을 연재하며 나림은 “실패할 각오로 쓴다”고 했다. 연재를 한동안 중단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마지막 대목을 완성했다. 1983년 ‘태백산맥’ 연재를 시작해 1989년 10권째를 완성하는 동안 조정래는 검찰 수사와 험한 공갈 협박에 시달렸다. 두 작가의 멘털리티(정신력)와 골기가 참 대단하다.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이다. 국제신문 DB
‘지리산’은 나림 자신의 이야기다. 나림의 죽마고우들 사연이다. ‘지리산’은 친구 박태영과 하준규를 위한 만사(輓詞)다. 그들의 ‘산(山) 사람’ 활동은 하준규의 ‘신판 임꺽정: 학병 거부자의 수기’와 이태의 ‘수기’를 참고하고 인용했지만, 상당 부분 직접 체험한 이야기이다. 리얼리티가 생생하다. 1921년생 나림은 이규 김경주 이나림 등 분신으로 등장한다. ‘태백산맥’은 1943년생 조정래의 벌교 삼촌들과 순천 여수의 지인들 이야기이며 절과 승려 에피소드에 부친도 등장하지만, 대다수 캐릭터는 창작이다. 어려서 목격한 참상들에 상흔이 남았겠지만, 리얼리티에 한계가 있다. 이어령은 조정래가 송사에 시달릴 때 “‘태백산맥’은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해 써진 ‘신판 홍길동전’이다”는 의견을 내며 변호해 준 적이 있다.

■각성, 부끄러움, 성찰

‘지리산’엔 있고 ‘태백산맥’엔 없는 게 있다. 작가의 각성과 부끄러움 그리고 자기 성찰이다. ‘지리산’은 나림의 자기 반성문이다. 나림은 로버트 페인의 이런 문장을 인용한다. “스페인 전쟁이 끝났을 때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겪은 경험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다. 그 싸움의 궁극적인 동기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조각조각으로 파괴된 신념의 파편을 주워 모았을 뿐이다.” 과연 ‘지리산’은 의분으로 그치지 않는다.

의분이 증오로 에스컬레이트(escalate·확대)되기보다 허망한 정열로 자제한다. 그리고 허망의 조각, 정열의 조각, 허망한 정열의 조각을 모아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나림의 ‘지리산’은 시종 휴머니즘이 묵중하고, 인사이트가 선명하다. 각박하지 않고, 치우쳐 있지 않다. 삶의 부득이함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깊다. ‘태백산맥’을 정독했던 독자들에게 ‘지리산’도 일독하기를 간절히 권유한다.

지리산을 중국의 옌안과 비교해 해방구로 만들자는 구상이 있었다.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비롯한 여럿의 생각이었다. 박태영은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세 판단의 중대한 오류이고 그저 레토릭으로 그랬다면 자기기만을 넘어 무수한 생명을 속인 용서받지 못할 처사라고 비판한다. 박태영도 결국 동참하지만 그건 “죽을 수 없으니까 죽는다”는 순간의 유예 심정이었을 뿐, 지리산과 옌안의 차이를 확실히 알았다.

중국공산당은 1만㎞ 대장정(Long March)을 할 만큼 넓은 공간을 활용했다. 장시(江西) 루이진에서 12만 명이 출발해 11개 성(省)을 지그재그로 이동하여 1년 만에 3만 명이 산시(陝西) 옌안에 도착했다. 동남쪽에서 서북쪽까지 18개 산맥을 넘고 24개 강을 건넜다. 지도부가 온존했고, 장제스의 최후 일격을 장쉐량이 병간(兵諫)을 일으켜 저지하는 운도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해방구에서 님 웨일스는 김산을 인터뷰해 ‘아리랑의 노래’를 썼고, 에드거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을 써 마오쩌둥을 세상에 알렸다. 류사오치는 ‘지리산’의 공산당원들이 교과서로 달달 외우는 ‘공산당원 수양론’을 썼다. 중국공산당은 3월(March)을 싫어한다. 혹독했던 Long March(대장정)가 사무처서다. 지리산은 아무리 3개 도에 걸친 거산이고 육산(肉山)이라 해도 고립무원 공간이다. 북한의 지령만 있을 뿐 무기나 군량 지원도 없고, 지역 주민의 지지는커녕 치솟는 원성으로 해방구는 언감생심이었다. 지리산에 가면 살길이 트인다는 이현상의 인식은 참으로 안이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정작 옌안까지 다녀왔던 김태준은 문화공작대를 조직해 지리산행을 감행하여 많은 문인을 사지로 몰았다. 김태준은 이희승 등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고, 20대에 ‘조선 소설사’를 쓴 천재 학자다. 한문학과 국문학을 연결해 한국 문학사를 정립했고, 훈민정음해례본을 찾아 간송 전형필이 매입 보존하도록 했다. 경성콤 그룹에 가입하여 옥고 치르고 병보석 중 부인과 함께 옌안으로 갔다가 해방 후 걸어서 귀국했다. 대륙을 횡단하며 옌안과 서울을 왕복했으면서도 중국공산당 대장정과 남로당 지리산 투쟁의 차이를 체감하지 못했다면 혁명가로선 부적격이다.

‘지리산’엔 김태준과 하준규 박태영이 혁명과 학문을 두고 토론하는 대목이 있다. 결론은 김태준은 학자로선 1류이나 투사로선 전혀 아닌데, 굳이 유진오 등 문인을 이끌고 이현상 부대에서 공작하다 체포 처형된다. 유진오는 해방 후 1호 필화 사건을 겪은 시인이다. 나림은 지리산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해방 직후부터 1955년 마지막 빨치산 박태영이 자결할 때까지 꽉 차게 10년 동안 지리산은 민족의 고민을 집중적으로 고민한 무대였다.

숱한 청년이 공비(共匪)를 토벌하다 죽었고 더 많은 청년이 공비로 죽었다. 그 원인을 규명하자면 조선공산당의 무모함이 가장 큰 요인이다. 조선공산당은 시종 착오의 연속이었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 결정적 대목이 바로 지리산이다.

조선공산당이 철저하게 실패작인 이유를 나림은 박헌영 일당의 처단으로 설명한다. 김일성 일당은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를 미국 스파이로 몰아 처형했다. 만일 박헌영 일당이 정말 미국 스파이였다면 남로당과 남로당 지휘를 받은 빨치산은 스파이에게 놀아난 집단이 된다. 만일 사실이 아닌데도 조작한 것이라면 그건 가공가소(可恐可笑)할 일이다. 무섭고도 우스운 일이다. 사실이어도 난감하고 사실이 아니라면 더욱 난감하다. 어이없는 만화 같은 스토리다. 명분을 스스로 액살(縊殺·목 졸라 죽임)한 그 집단의 선동과 조종을 받아 그 많은 청년이 공비로 죽었다면 언어도(言語道)가 단(斷)할 일이다. 기막힌 천재성을 지닌 친구와 두터운 인간성을 지닌 친구가 대성할 가능성을 잃고 그 놀음에 희생되었다. 천재 친구는 “대한민국이 나를 용서한다 해도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며 산에서 죽었다. 그 억하심정으로 나림은 ‘지리산’을 썼다.

■이 문제만큼은 단호했던 나림

나림은 자칫 빨치산이 될 뻔했다. 해인사에서 출가하려고 수도하던 때 대규모 빨치산이 내습해 물자를 약탈하고 경내에 머물던 학생들을 동원해 짐을 지웠다. 나림도 짐을 지고 따라나서야 하는 대목에서 나림을 알아본 후배 빨치산이 구실을 붙여 빼주었다. ‘지리산’에 그 대목이 소상하다. 그 탓인지 나림은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했을 때 빨치산 출신이란 흑색선전에 고전했다. 심지어 상대 후보는 지리산 빨치산 동지 일행이 이병주를 지지한다는 삐라를 조작했다. 당시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단편 ‘패자의 관’에 상세하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평론가가 나림이 빨치산이었다고 썼다가 광화문 대로에서 나림에게 따귀 맞은 일도 있었다.

좀체 성내지 않고 후배 문인들에게 마냥 너그러웠던 나림이 빨치산 문제에 관한 한 정색하고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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