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기행 특징의 경장편 소설

- 철학자 벤야민의 삶·행적 좇아

간절곶에서 출발하는 소설은 포르부(Portbou)에서 끝난다. 작가 함정임(사진)의 경장편 소설 ‘밤 인사’는 수채화나 시 같기도 하고, 패치워크(서로 다른 천 조각 등을 이어 붙여 새로운 이미지를 표현함) 느낌도 물씬 난다. 바탕에는 인문 기행의 특징이 깔렸다. 소설 주인공들과 함께 서울~간절곶~파리~부르고뉴~부산~세트~페르피냥-포르부를 간결하게 돌아보고 나면 독자 마음에는 그들 각자의 여행기가 각각 남을 것이다.

그 여행기 주제는 다채로울 것이다. 어떤 독자는 주인공 남성 장(Jean)이 주인공 여성 미나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는 사랑 이야기로 기억할 것이다. 어떤 독자는 미나 곁을 맴돌던 다감한 장이 갑자기 사라지는 데 주목해 생을 덮치는 상실과 ‘괜찮지 않지만 살아가게 되는’ 삶을 떠올릴 것이다. 스페인 도시이며 프랑스와 접경한 포르부에서 걸출한 인문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은 쓸쓸하게 죽는다. 벤야민을 기리는 조형 작품 ‘파사주’(통로) 등이 포르부에 있다. 아주 길지는 않은 이 소설은 발터 벤야민의 삶과 생각을 자주 불러들인다. 벤야민을 향한 추모와 질문으로도 ‘밤 인사’는 다가온다.

한 번 모이면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정해진 책을 각각 묵독하는 묵독 모임 회원이며 갓 작가가 된 미나가 뉴스 부문에 종사하는 남성 윤중과 새벽 2시 문득 간절곶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두 사람 다 인문주의자이고 독서인이며 SNS를 활용한다. 서로 호감을 느끼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미묘한 거리감도 있다.

그런 상태로 미나는 포르부를 최종 목적지로 삼은 프랑스 기행을 떠난다. 거기, 장이 있다. 순박한 인상의 장은 우연한 계기로 미나와 프랑스를 여행한 적이 있고 미나는 그 여행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 작가가 된다.

부산과 인연이 깊고 한국인의 피가 있는 사람으로 나오는 장과 미나는 서로 끌림을 느끼면서도 “이성적으로 유지해 오던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그 과정에서도 철학자 벤야민의 삶과 철학 이야기는 파도처럼 넘나든다. 두 사람의 여정 또한 벤야민의 행적으로 따라가는 형태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 대니 카라반이 벤야민을 기려 만든 조형물 ‘파사주’ 이야기가 인상 깊다.

그밖에도 시인 폴 발레리의 흔적인 강렬한 도시 세트, 작가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그려내는 파리의 길과 이미지가 인상 깊다. 서사가 굵은 소설은 아닌데도 이상하게 가슴에 찍혀 느낌이 오래 가는 작품이다.

작가 함정임은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소설을 쓰고 연구하고 가르친다.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면 가는’ ‘버스, 지나가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냈다. 중장편소설 ‘춘하추동’ ‘내 남자의 책’ ‘아주 사소한 중독’이 있고 이상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