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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에 짓눌리고 사랑에 사로잡힌 ‘가련한 망자’ 이야기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9> 슬픈 사랑과 허망한 사상 이야기 : ‘쥘부채’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9-14 19:26:11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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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범 수형자 이야기 많이 쓴
- 나림의 중요한 중편 ‘쥘부채’
- 빨치산 애인이 사형당해 죽고
- 자신은 감옥에서 병사한 여인
- 그의 유품인 부채에 담긴 한

아무런 희망 없이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다면 우리는 뭘 할까. 게다가 몸마저 망가져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우리는 마지막 대목을 뭘 하며 마무리할까.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를 끝까지 원망하며 이를 벅벅 갈거나 한숨만 푹푹 쉬다 끝날까. 아니면 뭐라도 징표 또는 흔적을 남겨보려 서두를까.
사진은 모두 KBS가 1980년 3월 14일 방영한 ‘문예극장’의 ‘쥘부채’(원작 이병주·주연 정동환) 편 장면이다. 당시 46세 중견 문학평론가이던 이어령 선생이 이병주의 문학세계와 ‘쥘부채’ 감상 포인트를 설명하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쥘부채’의 신명숙은 감옥에서 마지막을 작은 접선(摺扇 접었다 폈다 하는 손부채) 만드는 데 집중한다. 그 사연 절절한 유품을 새벽 나절 시신 수레가 지난 자리를 산책하던 동식이 줍는다. 마침, 눈밭이었다. 영천 고개와 독립문 사이 인도와 차도의 접경, 처녀설(處女雪) 위에 쥘부채가 반쯤 펼쳐져 있었다. “하아얀 눈 위에 검은 나비가 앉아 있어서” 주춤 발길을 멈추고 그 나비를 집어 들었다. 음습한 요기와 같은 에로티시즘이 느껴졌다.

■나림 중·단편의 매력

‘쥘부채’
나림 이병주는 수인(囚人) 이야기를 많이 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겨울밤’과 그 후속편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 그리고 ‘예낭 풍물지’와 ‘삐에로와 국화’ 등이 모두 옥살이하고 있거나 영어(囹圄) 생활을 겪은 사람들 이야기다. 다 사상 관련 수형자다. ‘쥘부채’에서 빨치산 활동하다 붙잡힌 남자는 사형당하고 그를 사랑한 여성은 무기징역을 살다 20년 형으로 감형돼 수형 중 17년 차에 병사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 이후 나림의 두 번째 수인 이야기로, 1969년 ‘세대’에 발표했다. 나림의 초기 중단편은 슬프고 아름답다.

서대문 형무소 부근에서 쥘부채를 우연히 주운 동식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실연으로 일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휘청거리던 차에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사랑 사연에 깊이 빠져든다. 내 코가 석 자인 멍한 상황에서 얼떨결에 남의 사랑 그것도 이미 죽은 이들의 사랑에 참견하게 된다. 우연이 인연으로 화하는 과정 그리고 좌충우돌 오지랖 부리며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이치, 나림 ‘청춘 스케치’의 한 전형이다. 사랑과 사상 사이의 거리재기는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다듬어지는 것이다. 물론 애만 쓰고 결국 그 거리가 조정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만.

■풋사랑이 낳는 번민

동식의 애인은 워커힐 방갈로에서 동정과 처녀를 교환한 후 홀연히 떠나버렸다. 애인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도 애인이고, 애 먹이는 사람도 애인이다. 동식의 애인 성녀는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매우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성녀는 “최대한의 노(No)와 최소한의 예스(Yes)로 된 여자”다. 영화관에 가서 뉴스가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나와버리고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와버리기 일쑤다. 노 백 번쯤 계속된 다음에야 예스 한 번을 얻는다. “중국집 음식은 불결해서 못 먹고, 냉면은 매워서 못 먹고, 불고깃집엔 사람이 득실거려 못 가고, 비프스테이크는 덜 구웠다고 또는 지나치게 구웠다고 먹지 않는” 까탈스러움에 녹초가 되지만 정성스러운 입맞춤에 금세 황홀해진다. “모든 행동이 얌체 가시내와 선머슴을 섞은 것 같은데 성녀의 키스만은 정성스러웠다.” 예스와 노를 조작하는 의식의 피안(彼岸)에다 황홀한 엑스터시를 만들어 내는 명수다. 위계(僞計)인지 사랑인지 알쏭달쏭하지만 동식은 성녀를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고 느꼈다. 홀연 연락이 끊긴 얼마 후, 결혼하고 미국으로 가고 있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엽서를 받았다.

성녀는 대학원에 다니는 선배로 동식보다 세 살 연상이다. “너보다 내가 세 살이나 위인데” 하며 한숨을 자주 쉬었으나 배신의 이유와 동기가 꼭 나이 탓은 아니다. 디즈레일리(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자 ‘비비안 그레이’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의 아내는 12년 연상이었으나 남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며 30년 해로(偕老)했다. 대부분 남편이 팔푼이 소리라고 면박을 주겠지만, 디즈레일리는 “30년 결혼생활 동안 단 한 번도 권태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총리 시절에도 의회에서 일정이 끝나면 서둘러 귀가하여 부인과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다.

셰익스피어 부인도 남편보다 6살 연상이었고 해로했다. 동식은 성녀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타나 “그 녀석하고 살아보니 시시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 하는 기적을 꿈꿔봤으나 허망한 바람이다.

■애절한 사랑을 보다

동식은 주운 부채를 돋보기까지 동원해 샅샅이 살핀 결과 나비엔 ㄱ,ㄷ,ㄱ이란 부호가 꽃엔 ㅅ,ㅁ,ㅅ이란 부호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 사연을 알고 싶어 재소자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곳도 가 보고, 퇴근하는 교도관을 붙들고 장기 여수(女囚) 명단을 부탁하기도 한다. 여러 정황을 취합한 결과 동식은 새벽에 시신을 인계받은 이모 내외가 수레를 끌고 가다 유품 보따리가 풀려 부채가 눈밭에 떨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병사한 여성의 이름은 신명숙, 그가 부채에다 사랑의 염원을 새긴 상대는 강덕기다.

신명숙은 “산으로 들로 끌고 다니다가” 먼저 죽은 애인을 애착하며 죽은 후에라도 뜻을 선사하려 한 것이다. 그 자취를 찾아 나선 동식은 우습고도 딱한 장면을 만난다. 신명숙 이모 집 마당에서 동네의 총각 귀신과 영혼 결혼을 시키려는 대목에서 강덕기의 동생이 찾아와 영혼 결혼은 자기 형님과 해야 한다고 우기며 언쟁한다. 분위기가 살벌하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언변이 나오는지 동식은 쥘부채를 펴서 보이며 신명숙의 염원과 집념을 변호한다. 동식의 열변에 강덕기 동생은 울음을 터뜨리고 신명숙의 이모는 통곡한다. 무당은 맥이 빠져 짐을 챙기고 동네 총각 귀신 모친은 “딴 사내를 좋아한 처녀 귀신을 내 아들인들 좋아할 턱이 있나” 하며 사진을 보따리에 싸서 일어선다.

동식은 단신 안산(鞍山)에 오른다. 강덕기가 처형당하고 신명숙이 17년 청춘을 묻은 서대문 형무소가 눈 아래 선명하다. 사람의 집념은 기필코 기적을 낳는다. 억겁의 시간 속에 수유(須臾)를 살며 그나마 찾을 수 있는 보람이 있다면 그건 집념에의 기대뿐이다. 쥘부채에 새겨진 집념은 맑은 공기로 남아 생명전생(生命轉生)의 기적을 만들 것이다.

해가 기울어 박명의 시간이 왔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지혜의 시간이다. 동식은 산에서 내려오며 자라투스트라의 외침을 들었다. “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 같다. 스스로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어야만 한다.” 동식은 안산에서 쥘부채와 이별하며 드디어 고소(高所)의 사상을 익힌 것이다.

■허망과 허망하지 않음 사이

나림은 프랑스 희곡 한 편을 소개하며 슬픈 사랑과 허망한 사상을 은유한다. “부르주아 출신 청년이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으로부터 어떤 지도자 암살을 지령받았다. 청년은 그의 비서가 되어 신임을 얻은 다음 치정 관련으로 꾸며 암살했다. 5년 형을 사는 동안 독이 든 초콜릿을 받은 적도 있고, 출옥 후엔 옛 애인을 만나는 자리에 암살자들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애인의 전언은 당이 청년이 죽인 그 지도자 세력과 연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청년은 전모를 밝히고 자신도 죽기로 작정한다.”

나림이 소개한 희곡은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명백한 정치적 악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한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둘째, 정치란 무서운 것이다. “자칫 분파의 편협한 의견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거나, 평생 주인 구실 못하고 꼭두각시 노릇으로 끝내거나, 자만만 늘어 인생의 기미를 모르고 지나거나, 공소한 표현 속에 진실을 분실해 버리거나, 기껏 민주 절차를 가장하거나 공짜나 바라다 말거나” 다. 강덕기와 신명숙이 추종했던 남로당 지도자들은 미국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했다.

진짜 스파이였다면 황당하고 스파이 혐의를 씌어 숙청했다면 공포스럽지만, 허망하긴 마찬가지다. 동식은 신명숙도 슬픈 사랑과 허망한 사상에 눌린 불쌍한 망자 중 하나라고 여긴다. 그리고 자기연민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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