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333-1’.

‘밖-앝’의 야외 전시 ‘혼종의 정원’이 열리는 장소는 텃밭이다. 부산의 도시 풍경에서 멀어진 지 20분쯤 되었을 때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비닐하우스와 함께 넓은 밭이 펼쳐졌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자 이혜진 작가의 ‘율무실크로드’와 전시 작품을 소개한 약도가 있다.

‘관람 가능 시간은 일출부터 일몰 사이로, 밝은 낮 시간에만 오픈됩니다’ ‘작품 안내는 비닐하우스 내 작품 약도와 캡션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풀벌레 등이 있을 수 있으니 간팔, 긴바지 옷을 입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서영 작가의 ‘이식된 구조’. 밖-앝 제공

범상치 않은 전시 안내를 본 뒤 약도를 들고 밖으로 나가니 커다란 가마솥 2개가 보이고 흙바닥에 벽돌이 여러 개 심겨 있다. 서영 작가의 ‘이식된 구조’다. 벽돌처럼 놓였지만 벽돌의 기능은 없는, 살아 있는 밭에 이식된 이질적인 구조물을 통해 ‘무엇이 자라고 무엇이 쌓일 수 있을까’를 묻는 작품이다. 비닐하우스를 나서자마자 전시가 시작됐다.

임종광 작가의 ‘지인차조각’. 밖-앝 제공

풀이 무성하게 자란 밭으로 내려가자 풀숲 사이에 조그만 모형차 몇 대가 놓여 있다. 임종광 작가의 ‘지인차조각’이다. 차를 살 때 겪었던 선택 장애의 순간을 작품으로 승화했다. 조금 더 걸어가니 풀숲 사이로 물감 튜브에서 피어난 식물 회화가 군데군데 눕혀 있다. 전시장이 아닌 흙, 땅에 식물화가 놓여 있어 마치 그림 속 식물이 대지에서 피어나는 듯했다. 캔버스를 벽이 아닌 토양에 놓고 작품을 땅 위에서 자라는 존재로 만든 최은희 작가의 ‘Land of Utopia’이다.

최은희 작가의 ‘Land of Utopia’. 밖-앝 제공

밭을 헤매듯 걷다 보면 곳곳에 작가들의 작품이 숨겨져 있다. 숲에 드리운 그림자를 작품으로 옮긴 전미 작가의 ‘그림자 깃발’, 도시 속 새의 흔적을 조형 언어로 재구성한 조정현 작가의 ‘새:아파트’, 액자 틀을 분해하고 쌓아 만든 이창진 작가의 ‘무심한 온실’ 등.

그중 풀숲과 밭 사이 우뚝 솟은 나무로 만든 평균대는 전시의 백미다. 평균대 위에 올라서면 옹골차게 자라고 있는 식물의 생명력에 기운이 돋고, 뒤섞여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를 갖춘 자연에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 평균대에 달린 송성진 작가의 ‘범벨’은 라오스에서 가져온 폭탄을 녹여 만든 오브제들이지만 자연 속에 매달려 있으니 마치 고요한 절에서 청아한 소리를 내는 풍경처럼 느껴진다.

송성진 작가의 ‘범벨(Bomb bell)’. 밖-앝 제공

다시 비닐하우스로 돌아오자 밭에 세워진 설치 작품 안에도, 그 아래에도 인간을 닮은 모형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비어가는 도시에서 살아 있는 텃밭으로 사람이 모이는 모습을 담은 것 같은 정안용 작가의 ‘당신의 자리’이다. 그렇게 둘러본 밭은 대자연과 여러 작가의 예술이 층층이 쌓인 ‘혼종의 정원’이었다.

정안용 작가의 ‘당신의 자리’. 밖-앝 제공

‘혼종의 정원’은 밖-앝이란 이름으로 모인 작가 15명(김등용 김보경 김태성 상환 서영 송성진 이창운 이창진 이혜진 임종광 전미 조정현 양나영 이자연 이지연)의 그룹전과 최은희·정안용·이재은 작가의 개인전이 합쳐졌다. 두명마을자연체험촌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주최로 단체전이 열렸고, 부산문화재단 우수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된 작가의 개인전이 더해져 2310㎡(700평) 규모의 밭에서 ‘혼종’의 풍경을 그려냈다.

밖-앝에 참여하는 작가와 기획자 20여 명은 3년 전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송성진 작가를 주축으로 알음알음 모여 초보 농부로 농사를 짓고, 밭을 무대 삼아 작품을 선보이는 특별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왕성히 활동하는 30·40·50대가 모여 있다. 작업실에서 작품만 만들다가 바깥으로 나와 배추 농사를 짓고 생소한 율무를 키운 과정은 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경험이 됐다. 그리고 밭은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는 밑거름이자 새로운 작품을 펼치놓는 무대로 확장됐다.

이런 작가들의 시도는 관람자에게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다. 정돈된 야외 정원, 화이트톤의 전시장이 아닌 자연 속에 작품이 있고, 그것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대지의 기운을 얻게 되는 색다르고 신선한 경험이다. 자연의 일부가 된 작품 역시 저마다의 생명력을 뿜으며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밖-앝의 송성진 작가는 “이곳은 밭의 기능을 잃어버린 수풀 뒤덮인 장소였다”며 “그래서 정원이나 안식처 같은 다른 기능의 형태로 바꿔보고 싶었다”고 텃밭을 소개했다. 그는 이어 “밭에서 다른 기능으로 확장된 공간, 안에서 밖으로 나온 작품이 혼종의 정원을 만들었고 전시로도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단체전은 17일, 개인전은 18일까지 열리며 이재은 작가의 공연은 26일 열린다. 자연의 일부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주소지를 찾아가 자유롭게 즐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