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문화 탐구해온 미생물학자
- 마을 공동우물 통한 상수도 관리
- 음식물 부패를 막는 보관법 등
- 옛 가옥·살림 과학적 지혜 소개

최근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 조선 시대의 전통 온실이 등장했다. 이 온실은 실제 역사이다.

경복궁 안 강녕전에 있었던 우물인 어정(御井). 조선시대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자 임금이 백성들에게 5가구마다 공동 우물을 하나씩 파도록 해 편리하게 생활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재열·사이언스북스 제공.

1459년 무렵 조선의 의관인 어의(御醫) 전순의가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책을 냈다. ‘농촌에 꼭 필요한 기록’이라는 뜻의 제목을 단 책으로,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자 농업책이다. 이 책에 한겨울에 채소를 가꾸는 온실 재배법 ‘동절양채’가 수록돼 있다. 당시 조선시대 궁중에서 시작된 방법으로 민간에까지 보편적으로 보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순의가 소개하는 온실 재배법은 세계 최초로 알려진 161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온실보다도 170년이나 앞섰다.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어디까지 미쳤던 것일까.

‘살림의 과학: 과학자가 풀어 주는 전통문화의 멋과 지혜’는 미생물학자인 이재열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의 전통 문화 탐색을 다룬 책이다. 인류 역사와 문명에 깊은 영향을 미친 미생물의 세계를 소개해 온 저자는 동시에 전통문화, 전통 과학,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다. 2009년에는 한국 전통문화에 숨어 있는 과학적 지혜를 정리하여 ‘담장 속의 과학’을 펴냈다. 2013년에는 수십 년간 수집해 온 백제 신라 가야의 고대 토기 가운데 157점을 한성 백제박물관에 기부했다. 박물관에서는 이 토기들을 정리해 2021년 기증 자료 특별전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를 개최했다. 이번에 출간된 ‘살림의 과학’ 역시 이런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

이 책은 ▷집으로 ▷부엌으로 ▷안방으로 ▷대청으로 ▷사랑으로 ▷마당으로, 이렇게 6부로 구성됐다. 우리 전통 가옥과 전통 살림의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과학적 지혜를 소개한다. 살림에 요긴하게 쓰이는 자잘한 가재 도구들, 집 곳곳에서 우리가 ‘살림살이’라고 부르며 써 온 것들을 세밀하게 살폈다. 전통적인 음식 조리법, 조리에 사용된 토기 도기 자기, 미생물의 공격으로부터 음식물이 썩지 않도록 애쓴 슬기로운 보관법, 맛있는 음식에 멋을 더해 주는 소반과 매병 같은 우리 고유의 가구와 그릇, 민화 병풍 베갯모 반닫이 갓 이엄(귀를 감싸는 방한모) 맷돌 금속활자 석빙고 등등.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미생물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줄 알았던 과학자가 언제 이런 데까지 다녀갔나 싶을 정도로 한반도 구석구석을 돌며, 살림에 사용했던 물건들의 온갖 꼴과 쓰임을 살피고 그 과학적 의미를 알뜰하게 살폈다. 저자의 수고와 정성이 오롯이 담긴 책이다.

‘샘과 우물 그리고 수도’ 편에서는 옛사람들의 상수도 관리법을 볼 수 있다. 옛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물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인지 먼저 살펴보고 집터를 잡았다. 오래전 신라시대에 경주에서는 한 골목으로 이어진 다섯 가구마다 하나의 우물이 있었던 흔적이 발굴된 바 있다. 조선 초기인 1415년에 가뭄이 들어 물 부족으로 백성들이 힘들어했다. 태종은 한양의 백성들에게 5가구마다 공동으로 우물 하나를 파도록 하여 생활이 편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곳곳에 지하수가 많아 우물을 만들기가 쉬웠다. 조선의 첫 궁궐인 경복궁 안에도 임금의 정식 침전강녕전의 우물 어정(御井)을 비롯해 우물이 24개나 있었다.

저자는 책에서 세심하게 다룬 각 살림살이에 관한 최신 연구들까지 더해서 소개한다. 역사학 민속학 건축학 등 각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이 전통문화의 가재도구들에 대해 수행한 최신 연구들과 그 응용 성과들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원로 학자인 저자의 관심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덕분에 책을 펼치면 오래전 기억 속 ‘그 옛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여행자가 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