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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 없이 냉철하게…나림이 평가한 자신의 인생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44> 나림 자신의 이른 만사(輓詞): ‘세우지 않은 비명(碑銘)’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12-07 19:27:41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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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12년 전 소설형식 빌려
- 직접 써내려간 자신의 만사

- 간암 말기 진단받고 죽음 앞둔
- 59세 작가·칼럼니스트 성유정
- 인생의 회한을 정리하려다
- 더 큰 회환을 확인하는 여정

- “그의 호학은 본받을 만했는데
- 다정·다감이 역정에 험이 됐다”
- 성유정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

세상을 떠나기 10년 전에 자신의 만사(輓詞)를 쓸 수 있다면, 그건 참 괜찮은 일이다. 나림 이병주는 세상을 뜨기 12년 전 자신의 만사를 썼다. 1980년에 발표한 ‘세우지 않은 비명’이다. ‘역성의 풍, 화산의 월’이란 제목으로도 출간되었다.

만사는 그 사람의 인물됨과 행장(行狀)을 기록하는 것이다. 스스로 쓰는 만사는 사실상 자서전이다. 다만 나림은 자서전(自敍傳)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고, 특히 자신 이야기에는 허세와 과장, 그리고 기억의 분식(粉飾)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 폐단을 없애고, 그나마 읽을 만하게 자서전을 쓰려면 개인사와 세계사를 연결하여 의미를 찾는 수밖에 없다.

“위대한 인간은 자전(自傳)을 쓰지 않고 세계사와 일체 되는 세계사를 쓴다.” 나림 필법은 늘 개인 이야기가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세계사와 함께하며 거기에 인문 향기가 더해진다. 나림의 소설이 꾀죄죄한 사소설(私小說)과 구별되는 대목이다.

■1979

2006년 4월 7일 이병주 작가 14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한 문인과 유족이 경남 하동군 하동읍 섬진강가 하동포구에 세워진 나림 이병주 문학비 앞에 헌화하고 있다. 소설 ‘세우지 않은 비명’은 이병주 작가가 별세하기 12년 전 자기 삶을 깊이 응시하며 쓴 글이기도 하다. 국제신문 DB
‘세우지 않은 비명’은 나림의 분신 성유정이 1979년 간암을 확인하고 생애를 정리하는 이야기다. 팔순 모친이 위암 진단을 받고 가료(加療) 중인 병원에서 옆구리 동통(疼痛)이 심해 혹시나 하고 검사를 한 결과 말기 암이 드러났다. 청천벽력이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어머님보다는 오래 버텨야 한다는 각오가 들었고, 다음 주변 모르게 최대한 서둘러 정리정돈해야겠다는 다짐이다.

장남으로서, 그리고 평생 애만 태워드린 불효자로서 어머님께 참척(慘慽)의 고통까지 드릴 수는 없다는 마음에 최후이자 결정적인 연극을 하기로 작정했다. 가족을 포함한 주위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 고백한들 결과엔 하등의 변경도 없을뿐더러 고백한 뒤 얼만가의 수탄장(愁嘆場)과 이어질 음습하고 구질구질한 장면이 싫었기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위신을 견지하고 싶은 것이다.

성유정의 59세, 1979년은 참 변화가 많았던 한 해다. “1979년은 참으로 이상한 해인데, 이상하다는 것은 하나의 색조(色調)로 기록할 수 있게 사건들을 묶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선, 1월에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붕괴했다. 프놈펜은 한자로 금변(金邊)이라 쓴다. 성유정은 스콜 직후 비에 젖은 가로수와 더불어 황금색으로 빛나던 프놈펜에 며칠 유한 적이 있다. 그 기막힌 도시를 폴 포트가 장악한 뒤 인구 거의 절반을 학살하거나 쫓아내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더니 드디어 폭정이 끝났다는 소식에 쾌재를 부르고 친우들과 근사하게 축하주를 마셨다.

이어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쫓겨났다.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으로 38년 권좌에서 내려온 팔레비 2세는 모로코 미국 멕시코 파나마 등지를 떠돌다가 이집트에서 객사한다. 급진 서구화 산업화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밀경찰에 의존한 교묘한 정치로 민심을 잃은 탓이다. 4월엔 우간다의 아민 대통령이 타도되었고, 파키스탄 대통령과 총리를 역임한 알리 부토가 정적에게 처형되었으며, 7월엔 니카라과의 소모사 대통령이, 9월엔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황제가 축출됐다. 10월엔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회한

‘세우지 않은 비명’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1963년 이병주(왼쪽) 작가가 부산교도소에서 출감할 때 모친 김수조 여사와 찍은 사진.
성유정은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다. 1979년의 의미를 모색하며 우연이니 섭리니 이렇게 저렇게 타이틀을 달아 보지만 썩 마땅치 않다. 아나톨 프랑스를 떠올리며 “그의 솜씨 같으면 동서양의 재료를 고루 섞어서 꽤 맛 좋은 푸딩을 만들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상상하지만 족탈불급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선명한 문장과 유머로 인사이트를 주는 대작가다. 프랑스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던 드레퓌스 사건 때 인간성과 자유를 외며 무죄를 호소했던 양심 세력의 대표 문사다.

성유정은 다만 이디 아민 집권 때 몇 번 쓴 칼럼을 뒤적여볼 뿐이다. 아민 평론은 두 가지 방향이었다. 하나는 아민의 정치관 또는 정치력이고, 다른 하나는 아민적 지배하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살펴 억압을 견디는 인간의 내구도(耐久度)를 측정해 보는 것이다.

아민은 무엇보다 오래전 실종된 권력자의 자부와 허세를 부활시킨 공로가 있다. “내가 곧 국가이고 법이다”라는 루이 14세 같은 뱃심 좋은 정치인이 사라진 시대에 “우간다에선 정치는 나만 하면 된다”고 선언하고, 정치활동 하는 자들을 사정없이 학살하고 대량의 재판관을 해임했다. 외교가의 전설인 미국의 키신저 장관이 사임하자 우간다로 유학 오면 정치술과 외교술을 직접 가르쳐주겠다고 호언했다. 아민의 의미는 생경하게 노출된 정직성에 있다. 그 야만적 정직성을 증명하는 데 8년의 권좌는 너무 길었다. 성유정은 그런 풍자의 칼럼을 썼다.

둘러보니 읽지 못한 책들도 아깝고, 친구들과 마르크스 독회하기로 한 약속도 걸렸다. 젊은 문인들은 집에 몰려와 정치제도 논쟁으로 열을 올리지만, 그 논전에 참여할 기력도 흥미도 없다. 다 산 자의 노릇이다.

■더 큰 회한

이제 회한사(悔恨事)를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못되고 못났던 청춘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말기 간암은 통증이 심하다. 진땀이 나고 당장 쓰러질 것 같지만 굳이 마지막 여행을 한다. 혹시라도 만회하고 보상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37년 전 기억을 더듬어 헤맨다. “내가 한 일에 대한 회한만 없으면 편히 죽을 수 있겠다”는 일념에 며칠 남지 않은 생애를 일본 이곳저곳 수색하며 보낸다.

그 회한은 학창 시절 임신한 애인을 무책임하게 버려둔 일이다. 고향 동네와 학교를 찾아보고 지인을 수소문하지만 미네야마 후미코를 찾기엔 너무나 늦었다. 오직 확인한 건 결혼하지 않은 채 37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이다. 폭격으로 죽었는지 병사했는지 자살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한국에 산 적 있다는 교사 하나가 신실하게 찾기를 도와준 끝에 “참, 고등학교 학적부를 봤더니 성적이 꽤 좋던데요. 쭈욱 우등생이었습니다”고 한다. 죽어 없어진 사람이 우등생이었으면 무엇을 하느냐 싶어 실소(失笑)했다.

회한을 해소하러 갔다가 또 다른 회한만 남기고 돌아왔다. 당장 병석에 계신 어머님을 뵈러 가야 하지만 열흘 동안 먹는 듯 마는 듯 술만 마시고 고통에 시달린 형상이 너무 험악해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면도를 하고서야 나섰다. 장남의 음성을 듣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한 모친의 유언은 “인자 됐다. 느그들 모두 잘 지내라.” 한마디다. 진실로 위대한 메시지다.

■성유정의 연꽃, 나림의 연꽃

성유정은 안간힘으로 버틴 끝에 모친 타계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늘 양주에 묻히고 싶어 했다. 당나라 시인 장호(張祜)의 ‘종유회남(縱遊淮南)’ 한 대목이다. “인생지합사양주(人生只合死揚州)”. 양주는 장강 중하류의 당대(唐代) 물류 중심지이자 문화도시였다. 장보고의 베이스캠프이기도 했다. 두목(杜牧)의 ‘번천문집’에 장보고를 곽자의에 비견하여 영웅으로 추앙하는 대목이 있다.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써서 문명을 날리고 고을살이를 했던 곳도 양주다. 근대에 와선 학문과 예술에서 ‘양주학파’의 성취가 상당하다.

성유정은 학병 시절 양주에서 복무하며 양주의 산수와 민풍에 반했다.

성유정은 장쑤 양주(揚州)가 아닌 경기도 양주(楊州)에 묻혔다. 그의 묘비명은 “그의 호학은 가히 본받을 만했는데 다정과 다감이 이 준수(俊秀)의 역정에 험이 되었다”이다. 성유정은 재(才)도 있고 능(能)도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충실한 문학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딜레당트로 끝났다. 그 딜레당트의 늪 속에서 혹시나 연꽃이 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의 기대였으나 라이프 워크라고 할 만한 작품 없이 운명(殞命)하고 말았다. 이 대목은 나림의 자신에 대한 자평(自評)이다.

나림을 아끼는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과 ‘악령’만으로도 이미 위대하지만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을 쓰면서 신이 되었다”는 나림의 표현대로 나림 또한 라이프 워크 남기기를 기대했다. 헐렁한 연재소설 쓰는 시간에 밀도 높고 인사이트 강렬한 작품에 집중해 주기를 바랐다.

사람은 나름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나는 그래도 나림의 다작(多作)에 고마움을 느끼는 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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