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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 지붕을 얹은 생가. 김유정문학촌은 생가와 기와를 얹은 기념전시관을 비롯해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됐다. |
- 소설 배경된 실레마을·금병산
- 문인·지자체 합심 문학촌 변신
- 예술성 대표하는 작품 ‘동백꽃’
- 토속적 미학·애정 풍속도 백미
- 스물일곱 등단-스물아홉 요절
- 그를 삼킨 결핵 원망스러울뿐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서 주인공이 점순이와 함께 ‘동백꽃’ 향기에 파묻히는 순간의 묘사다. 소설에서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핀 농촌 마을의 ‘동백꽃’은, 이미자가 노래로 부른 그 동백꽃이 아니다. 우리나라 중부 지역에서 봄철, 몸체에 노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꽃’을 이르는 말인데, ‘동백기름’은 곧 이 나무에서 얻는 것이다.
■꽃향기 속으로 문학촌 가는 길 |
| 김유정 |
마침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김유정문학촌을 찾아가는 날의 산천은 연초록의 새 덧옷으로 눈부시기 이를 데 없었고, 김유정의 동백꽃은 만개(滿開)의 고개를 넘어섰으나 온 천지에 아카시아와 이팝나무의 꽃이 백색의 향내를 흩뿌리고 있었다. 과연 ‘봄·봄’이었다. 문을 연 지 24년에 이른 김유정문학촌은 봄날의 맑은 햇살 아래 고즈넉하면서도 정갈하고, 잠잠히 숨죽인 가운데서도 방문객들의 발걸음으로 활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오늘의 김유정문학촌이 있게 한 탄생 담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작가 전상국 선생이 있다. 선생이 춘천의 문학적 정서와 사람들을 모으고 시(市)의 지원을 받아 문학촌을 건립한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유품 하나 없는 김유정의 문학관을 모양 좋게 일으켜 세우는 그 과정이었을 터이다. 김유정 소설의 태반이 무대로 하고 있는 실레마을과 금병산 일대 전체를 문학촌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미상불 천재적(?)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2만1120㎡(6400여 평) 부지에 1884㎡(570여 평)에 달하는 건축 면적을 가진 김유정문학촌은, 아담한 기와집으로 된 문학관 곧 김유정 기념전시관과 초가 지붕을 얹은 생가가 있으며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집들로 구성된 체험방·북카페·이야기집 등의 공간 및 야외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만한 규모와 콘텐츠를 갖추기까지 지역 문인과 주민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경주되었겠으나, 춘천시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과 전폭적인 지원이 함께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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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전시관 내 김유정의 외롭고 고단했던 삶을 보여주는 ‘유정고도’. |
■서정성 짙은 향토소설의 백미황순원의 ‘소나기’에 필적할 만한 서정적이고 향토성이 강한 소설을 들자면 김유정의 ‘봄봄’이나 ‘동백꽃’을 빼어놓을 수 없다. 온 천지에 봄기운이 충일한 이 시기에 떠올릴 만한 작품들이다. 춘천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들은, 농촌의 청춘남녀가 설레는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핵심이 있다.
그중에서 ‘동백꽃’은 1936년에 발표되었으며, 김유정 소설의 예술성을 대표한다. 순후하고 토속적인 이야기 무대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우리 고향의 한 모습과 인간의 강박의식을 엿볼 수 있는 단편소설이다. 소작인과 마름이라는 신분 관계에 약간의 갈등이 내포되어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이고 방점은 향토의 토속적 미학에 있으며, 거기에 인생의 봄을 맞아 이성에 눈떠가는 사춘기 남녀의 애정 풍속도를 더하여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유정의 소설이 모두 그러하듯이, ‘동백꽃’ 또한 현실에 대한 대결의 정신보다는 익살스럽고 유쾌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토착 언어의 자연스러운 구사와 인물의 희화화(戱畵化)에 의해, 우직하면서도 애련(愛憐)을 지닌 인물을 제시한다. 그 시기 농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속이나 풍물, 방언 또는 속어의 구사,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어조 등은 이 소설의 미학적 가치를 빛나게 한다.
이 소설에서 눈치 없고 좀 모자라는 ‘나’가 점순이의 은근한 사랑 표현과 구애 동작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반어적 상황과 해학적 싸움이 벌어진다. 점순이가 주는 ‘구운 감자’나 ‘닭을 골리는 일’이 애정 표시인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나’의 우둔함과 더불어, 두 사람의 계층이 서로 다르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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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에서는 동백꽃으로 불리는 생강나무꽃. |
■작가 김유정의 생애와 그 작품1930년대의 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김유정은, 1908년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실레마을에서 태어나 1937년 스물아홉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했다. 이 짧은 생에의 기간에 단편소설 30편, 수필 12편, 편지·일기 6편, 번역소설 2편을 남겼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논문은 400편에 가까운데, 이는 그의 문학사적 지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김유정은 1935년 27세 약관의 나이에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의 신춘문예 공모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됨으로써, 모든 문학 지망생의 부러움을 사며 문단에 나왔다. 등단하자마자 ‘금 따는 콩밭’, ‘떡’, ‘만무방’, ‘봄봄’ 같은 걸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다시 한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가 공식적으로 문필 활동을 한 시기는 불과 3년을 넘기지 못했다.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휘문고보에 다닐 때, 나중에 월북한 친구 안회남에게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며 ‘미인’이라고 자랑한 일화가 남아 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연희전문 시절까지 이어져 연상의 여인이자 명월관 기생으로 당대 남도창의 명창이었던 박녹주에 대한 짝사랑으로 나타난다. 물론 박녹주는 치기 어린 연하 남자의 연모를 단호히 무시했다. 사랑에 실패하고 형으로 인해 집안이 파산하자, 김유정은 1930년 학교를 중퇴했다. 그때 이미 늑막염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이듬해 1931년 고향인 실레마을로 낙향했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요양에만 매달리지 않고 ‘금병의숙’이란 야학당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뒷산 이름이 금병산이었다. 김유정은 한때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돌다가, 1932년 다시 실레마을로 돌아와 본격적인 계몽 운동에 나선다. 이 무렵은 1920년대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브나로드, 곧 농촌 계몽 운동이 조직화 되어 펼쳐지던 시기다.
■그가 문학사에 남겨둔 자취들이 무렵부터 김유정은 글쓰기에 매달려 1933년 1월 ‘산골 나그네’를, 8월 ‘총각과 맹꽁이’를 탈고한다. 당시 ‘개벽’이라는 출판사에 다니던 안회남에게 ‘산골 나그네’를 보내고, 이 작품은 ‘제일선’에 발표된다. 1933년에 발족 된 ‘구인회’에 들어가면서 창작열이 불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벌써 폐결핵의 침식으로 그의 몸은 쇠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로부터 김유정은 구인회 회지 ‘시와 소설’에 ‘두꺼비’, ‘개벽’에 ‘금 따는 콩밭’, ‘중앙일보’에 ‘떡’, ‘조선일보’에 ‘만무방’, ‘조광’에 ‘봄봄’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5년 두 신문 신춘문예에 동시에 당선되어 크게 주목받게 되었다. 글쓰기는 김유정에게 현실로부터 도피처이기도 했다. 김유정의 소설들은 1930년대 농촌을 배경으로, 해학적이면서도 현실 비판 의식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독특한 성향을 보여준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김유정의 소설에서 거의 순우리말로 된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의 수필이 어려운 한자어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소설의 언어 선택이 사뭇 의도적이었다고 유추할 수밖에 없다. 문학사에서는 1930년대의 작가 김유정, 이효석, 이상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김유정은 하늘로 올라가고 이효석은 땅에 남고 이상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는 김유정이 가진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세계, 이효석이 보여준 사실적인 현실 밀착의 세계, 그리고 이상이 탐색한 무의식의 심층과 상징성의 세계를 일컫는 구분이다.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김유정문학촌이 지금 춘천 실레마을에 조성되어 있어 후인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한국의 100개가 넘는 문학관 가운데 이곳과 황순원문학촌만 그 이름에 마을 촌(村) 자를 붙였다. 문학관과 넓은 야외공간을 함께 문학마을로 꾸몄기 때문이다. 김유정 타계 89년,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은데 작가는 말이 없고 그 문학마을만 상춘객(賞春客)으로 분주한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