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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아유타야에서 규모가 큰 대표 사원 왓 프라시산펫. 왕실 전용 사원으로, 3개 회색 체디(둥근 돔과 첨탑이 결합된 종 모양의 탑)가 있다. |
- 1350년 건국된 아유타야 왕조
- 버마에 패망 전까지 400년 번성
-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랜 왕조 기록
- 전쟁·세월에 바래고 훼손됐지만
- 여전히 찬란한 사원·왕궁과 불상
아유타야는 방콕에서 북쪽으로 약 70~80km 떨어진 태국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1350년에 건국된 아유타야 왕조는 1767년 버마(현 미얀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417년 동안 존재했던,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랜 왕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왕조의 수도였던 아유타야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해상무역 중심지로서 세계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국제적 상업 도시였다. 지금 유적지에 남아 있는 사원과 건축물들은 당시 왕조의 찬란했던 영광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영광의 빛보다 전쟁의 상흔이 남긴 몰락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진 곳이기도 하다.
■보리수가 감싼 부처님 두상아유타야 유적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왓 마하탓’(성스러운 사리를 모신 사원)이다. 보리수나무에 감싸인 부처님의 두상 때문이다. 현재 사리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불두(佛頭)가 사원의 영적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꼭 답사하고 싶었던 곳이기에 망설임 없이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침내 알현한 보리수에 감싸인 불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두상의 높이보다 낮은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두상보다 높은 위치에서 서서 사진을 찍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부처님의 표정이 너무 달라서,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모욕 속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보리수 뿌리에 죄여 고통스러우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는 표정이라 했다. 왜 부처님을 나무 안에서 꺼내지 않고 그대로 두느냐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보리수에 감긴 부처님의 두상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이제 꺼낼 수도 없다. 세상 어느 유적지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오직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유일무이한 광경이다.
어쩌다 부처님의 두상이 보리수나무에 갇히게 되었을까. 아유타야 왕조가 버마와 스무 차례 넘게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전쟁을 겪고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이 유적지에는 성한 곳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쟁 속에서 불상이 파괴되며, 우연인지 필연인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에 떨어졌고, 그 뿌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처님의 두상을 감싸버린 것이다.
그런데 보리수가 성스러운 나무여서인지, 부처님의 두상은 많은 이를 깊은 성찰로 이끌어 주는 듯했다. 이곳을 찾는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리수 뿌리가 불두를 품어 보호하는 모습은, 시간이 흐르며 상처가 치유되고 그것이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또한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니 폭력에 흔들리지 말고 마음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참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부처님의 두상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왓 마하탓’의 그나마 남은 탑들도 속절없이 기울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경제적 힘이 문화재를 지켜낼 수 있는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유네스코가 잘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기울어가는 탑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성자필쇠(盛者必衰), 성한 것은 반드시 쇠하기 마련이니, 쓰러지지 않겠다고 힘들게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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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 마하탓(사리를 모신 사원)의 보리수나무에 갇힌 부처님 두상. |
‘왓 마하탓’에서 도보로 약 15분 걸어가면, 아유타야의 가장 규모가 큰 대표 사원 ‘왓 프라시산펫’(성스러운 산펫 부처님을 모신 사원), 왕궁터에 세워진 왕실 사원을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왕실 사원으로 지었기 때문에 이 사원은 오로지 왕실의 행사에만 사용되었고, 왕실의 급에 맞추어 사원은 매우 크고 화려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동서로 이어진 ‘체디’(스리랑카 양식의 둥근 돔과 첨탑이 결합된 종 모양의 탑)라고 불리는 웅장한 회색 불탑 3개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있다. 이 3개의 불탑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내부에는 아유타야 역대 왕 3명의 유골과 유품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으니, 왕조의 납골당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원은 왕실 사원이었기에 약탈도 더 심했다. 이곳에는 금을 입힌 높이 16m, 약 343㎏의 금으로 장식된 입불상이 있었는데, 당연히 적군이 불상의 금을 녹여 가져갔다. 금을 보고 그냥 두었을 리가 만무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군사들에게 일정한 시간을 주어 정복한 나라를 약탈할 시간을 준다고 했던가.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싸우느라고 고생한 데 대한 보상이 목적일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인간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나 근본적인 화두였다. 농사를 짓던 농민군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내몰렸고, 생존을 위해 약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상은 인간을 더욱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야만성을 극한으로 치닫게 했음을 인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 본성의 선을 짓밟고, 약탈을 당연시하는 전쟁, 과연 어떻게 해야 이 굴레를 끊어낼 수 있을까.
■승리의 사원에서 만난 불상들아유타야에는 버마와의 전쟁에서 패망한 사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버마에 통쾌한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세워진 사원도 있다. 바로 ‘왓 야이차이몽콘’(위대한 승리의 사원)이다. 높이 72m에 달하는 거대한 체디는 1592년,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나레쑤언 왕이 코끼리 위에서 버마 왕자를 맨손으로 쓰러뜨려 대승을 거둔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전쟁 중 맨손으로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다소 믿기 어렵지만, 그 정도는 칭송해도 괜찮을 듯하다. 그 많은 전쟁에서 어렵게 거둔 승리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 승리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고자 이렇게 거대한 사원을 세웠으니, 얼마나 그 승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했는지 그 마음이 짠하게 와닿았다. 결국은 버마에 완패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유일하게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어서인지 다른 사원과 비교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고 경쾌하다. 아마 화려한 스리랑카 양식의 건물도 그렇고, 부처님이 입고 있는 노란색 가사(袈裟) 때문이지 싶다.
이 승리의 사원 안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불상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중앙 불탑 주변에는 불상들이 길게 일렬로 늘어서 있어 마치 불상 전시회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새삼 태국이 불교 국가임을 실감했다. 태국의 정식 국명은 ‘타이왕국’으로, 국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불교가 깊이 뿌리내린 나라다. 그런데 알고 보면 미얀마(전 버마) 역시 불교 국가다. 태국은 인구의 약 93%, 미얀마는 약 91%가 불교 신자이니,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적어도 종교적 이유는 아니겠다.
그러나 16세기 후반부터 200여 년 동안 이 두 나라는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이었다. 그 긴 갈등의 역사는 9세기에서 11세기께, 버마족과 타이족이 중국 남쪽에서 각각 남하해 왕국을 세우면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두 민족 모두 인도로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다툼 속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와 평화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듯하다. 마치 부처님의 가호가 아유타야를 저버린 듯, 사원 대부분이 초토화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버마를 이기고 ‘왓 야이차이몽콘’에 승리를 새긴 아유타야 왕조, 태국인들에게 이 승리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패배는 빨리 잊고 싶어도, 승리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는 인류의 끝없는 전쟁 속에서 평화는 단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며, 서로를 향한 파괴는 끝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그 상처는 결국 우리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파괴만 하다가 인간다움조차 잊은 채 상처만 안고 떠나야 하는 불행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니, 참담한 심정이다. 전쟁의 상흔만 가득한 아유타야를 떠날 때, 어디선가 진정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는 절규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절규로 아유타야는 너무 슬픈데, 그때 올려다본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도 푸르고 푸르렀다. 아, 저리도 무심한 하늘이라니!
최진숙 전 영산대 글로벌학부 교수·‘세계10대유적지기행’ 저자·유적지 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