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구 사직동 아시아드 보조경기장 뒷편 언덕배기에 하얀색 4층 건물이 있다. 양정모 체육관이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의 쾌거를 기념해 지은 체육관이다. 양정모는 부산 출신으로 건국상고를 나왔다.

한국 레슬링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레슬링을 이끌고 있는 강경성(57) 부산레슬링협회 회장은 선수 시절 양정모와 1승1무1패를 기록했다고 한다. 자칫 '강경성 체육관'이 될뻔도 했던 양정모 체육관에서 지난 10일 강 회장을 만났다.

체육관은 열기로 후끈하다. 전국체전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라 부산시내 고교 대학 실업팀이 한데 모여 연습을 하고 있다. 늦더위에 시큼한 땀냄새가 코를 찌른다. 땀에 젖은 매트는 밟으면 금방이라도 물같은 땀이 배어나올 것만 같다.

노타이 차림으로 연습장 옆 부산레슬링협회 사무실을 들어서는 강 회장과 악수를 하면서 습관적으로 귀부터 본다. 귓바퀴 윗부분이 수제비 모양으로 두툼하게 찌그러져 있다. 레슬링 선수들은 연습이나 시합 때 매트에 머리나 얼굴을 비비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장 튀어나온 귀가 매트에 쓸려 피가 나고 굳기를 반복하다보면 귓바퀴 윗부분이 두툼해진다. 그 모양이 흡사 '수제비'를 닮았기 때문에 운동선수들 사이에서는 레슬링 선수들을 '수제비'라고 부른다. 강 회장은 외모로는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보이지 않는다. 체격(170㎞ 72㎏)보다 왜소해 보인다. 그러나 강 회장의 귀는 그가 레슬러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레슬링협회를 통해 미리 받아본 강 회장의 이력서는 단출했다. 레슬링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시피 했다. 선수 경력과 1986년부터 부산레슬링협회 감사를 시작으로 부회장 회장 등 임원 경력이 전부다.

선수시절 수상 경력은 서울 남산공전과 육군을 거치면서 전국대회 세차례 우승과 한차례 준우승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선수 시절 성적을 본인인 강 회장보다는 부산레슬링협회 전도부(62) 사무국장이 더 잘 알고 있다. 강 회장과 인터뷰 도중 선수시절 성적에 대해 강 회장이 기억에 자신이 없는 듯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전 국장이 나서더니 줄줄줄 왼다.

"1969년 전국학생레슬링선수권대회 자유형 페더급에서 강 회장이 우승했고 양정모(당시 건국상고)가 2위를 했다. 1973년 전국체전 일반부 자유형에서는 창원의 육군부대에 복무하던 강 회장이 경남대표로 출전해 양정모에 이어 2위를 했다."

어째 본인보다 주변 사람이 더 잘 아느냐고 묻자 강 회장은 겸연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사실 강 회장은 선수 시절에 대한 미련이 없는 듯 했다. 대한민국 올림픽의 영웅 양정모와 맞수였다는 사실에 흥분하는 기자가 오히려 무색해진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에는 운동으로 생활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하면서도 늘 머리속에는 운동 그만두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살까라는 생각뿐이었다. 선수 생활을 일찍 접고 골재사업 등으로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또 당시로서는 아주 늦은 34세에 결혼을 한 것도 제대로 자리를 잡고난 뒤에 가정을 꾸리겠다는 마음가짐 탓이 컸다."

부산 영도 출신인 강 회장은 1986년 부산 레슬링협회 감사를 시작으로 재무이사 부회장을 거쳐 2000년 7월부터 현재까지 7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다. 부산의 45개 경기단체 회장 중 장기집권하는 편이다.

"전임 회장이 1년도 못하고 사퇴하면서 당시 부회장이던 나에게 이제는 경기인 출신이 한번 해보라고 했다.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수락했다. 당시 이런저런 사유로 협회가 시끄러울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비경기인 출신의 외부인사가 회장을 맡기보다는 경기인 출신이 맡는 게 잡음을 최소화하고 사태를 조기에 수습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떠밀리다시피 맡게 됐다."



회장이 되고 보니 당장 부담스러운 것이 재정문제였다. 현재 강 회장은 한 해에 회장 출연금으로 3000만 ~4000만 원 가량을 낸다. 개인적으로 두군데 식당(밀면 전문)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입장에서는 적지않게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내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업가라면 협회장으로서 레슬링 후배들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데 그게 안되니 늘 마음에 짐이 된다. 협회장과 이사진이 레슬링 선후배들로 이루어져 있어 서로 마음이 편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등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업체 대표 등 비경기인 출신이 회장직을 맡고 운영은 경기인 출신이 맡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럽다고 본다."



그럼에도 부산시체육회 지원분 포함 한해 1억 4000만 원 정도의 협회 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비결은 강 회장이 개인적 친분 등으로 재정 부회장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이다. 김영길(경도고철 대표) 이의규(코리아V익스프레스 대표) 김동균(영동건설 대표) 이종근(보람테크수산 대표) 김정도(광안리 언양불고기 대표) 주석수(연제구의원) 부회장 등이 재정적으로 강 회장을 뒷받침한다.

이날 인터뷰는 강 회장이 대상이다. 그런데 협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다보니 수시로 부회장단과 이사진이 들락날락거리면서 한마디씩 거드는 통에 부산레슬링협회에 관한 인터뷰처럼 되어버렸다. 경기인 출신이 회장을 맡고 있는 경기단체 특유의 현상이다. 비경기인 출신 외부인사를 회장으로 영입한 단체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인터뷰가 1시간을 넘기자 곳곳에서 그만 끝내라는 사인(?)이 들어온다. 육중한 체구의 협회 이헌창(50) 부회장이 끝낼까 말까 망설이는 기자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아까부터 회장님 면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취재수첩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머뭇거렸다가는 빠테르 자세로 옆굴리기를 당할 판이다.



# 부산 레슬링 최대과제

- 후진양성· 대회유치 시급


부산 레슬링의 최대과제는 저변확대다.

강경성 협회장 재임중 용호중 장전중 반송중 팀을 창단, 현재 중학교 팀이 6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담당교사인 부감은 레슬링 전공자가 아니다. 체육교사이기는 하지만 레슬링 출신이 아니어서 선수발굴 등이 어렵다. 부산시체육회나 교육청에서 파견하는 지도자가 지도를 맡고 있지만 이들이 선수발굴이나 저변확대까지 책임지기는 어렵다.

부산레슬링협회 차봉준 부회장은 "광주 대전 전남 강원도 등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채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레슬링 복싱 육상 체조 등 비인기종목 팀의 지도를 위해 해당종목 전국대회 금메달리스트들을 대상으로 필기시험을 치러 이들을 교사로 정식채용해 각급 학교팀에 파견하면서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고 밝혔다.

부산레슬링협회에서도 차선책으로 그동안 여러차례 교육청 등을 대상으로 사립학교에 근무하는 레슬링 전공 교사들을 레슬링 팀이 있는 공립학교로 이동시켜 달라고 건의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부산 레슬링의 또다른 과제는 전국대회 유치다.

국제대회는 고사하고 국내대회도 최근 10년간 개최된 적이 없다. '양정모 올림픽 제패기념 대회'도 올해로 31회째를 맞는데 지난 7월 강원도 태백에서 열렸다. 올해초 양정모씨가 부산에 내려와 부산시 등을 상대로 전국대회 유치 활동을 벌였으나 무산됐다.

배혁 전무이사는 "대한레슬링협회에 납부하는 대회 유치비가 최소 5000만 원이나 된다. 강원도의 속초 태백 평창과 제주 등은 민선시장들이 선수단 방문에 따른 숙박비 식비 등 경제적 효과까지 감안해 유치비를 지원하며 경쟁적으로 유치하지만 부산 등 광역시의 경우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해 대회유치가 어렵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