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 안 잊고 한국과 인연 맺어
- 김연아 “훌륭한 선수 잃어 슬퍼”

카자흐스탄 피겨스케이팅의 영웅이자 일제강점기 항일 의병장의 후손으로 알려진 데니스 텐(25)이 흉기에 피습당해 사망했다. 생전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피겨여왕’ 김연아(28)를 비롯한 많은 선수의 추모가 이어졌다.

카자흐스탄 남자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데니스 텐이 지난 2월 16일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카자흐스탄 현지 매체들은 데니스 텐이 지난 19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괴한에게 피습당해 사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목격자들은 “데니스 텐이 난투극을 벌였고, 구급차에 실려 갈 당시 한쪽 다리에서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카자흐스탄 수사 당국은 데니스 텐이 자신의 승용차 백미러를 훔치려던 범인 두 명과 난투극을 벌이다 칼에 찔린 것으로 보고 범인 2명의 뒤를 쫓고 있다.

알마티 출신의 데니스 텐은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민긍호 선생의 고손자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 민 선생의 외손녀인 김 알렉산드라가 텐의 할머니다. 그의 성인 텐은 한국의 정 씨를 러시아 키릴 문자로 표기한 것이다.

‘고려인’ 텐은 항상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선수 이력엔 ‘한국 민긍호 장군의 후손’이라고 표기했고, 한국 역사책을 읽으며 공부하기도 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는 김연아의 소속사인 올댓스포츠와 계약하고 국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국과 인연을 이어갔다.

데니스 텐은 카자흐스탄 피겨 역사를 새로 쓴 ‘국민 영웅’이다. 2013 ISU 세계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 남자 싱글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카자흐스탄 사상 첫 피겨 메이저대회 메달을 획득했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보냈다.

텐은 2015년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ISU 4대륙 피겨스케이팅에서 역대 남자 싱글 선수 중 세 번째로 높은 289.46점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은퇴를 고려했지만 할머니의 조국에서 열릴 평창동계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더 뛰었다.

대회를 앞두고 오른발 인대를 다치는 불운에 시달렸지만 통증을 참고 출전을 강행했다. 부상 탓에 쇼트 프로그램에서 70.12점으로 27위에 머물러 프리스케이팅 진출에 실패했다. 그는 경기 후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고 활짝 웃었다.

텐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카자흐스탄은 물론 한국에서도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텐과 한솥밥을 먹었던 김연아는 20일 SNS에 생전 텐과 나란히 찍은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그는 “데니스 텐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어 너무 충격적이고 아직 사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가장 열정적이고 훌륭한 스케이터를 잃어 너무나 슬프다”고 적었다.

한국 피겨의 간판 최다빈(고려대)도 SNS를 통해 “데니스 텐의 사망 소식을 믿을 수 없다. 카자흐스탄에서 날 챙겨주고 힘이 돼 줬던 텐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슬퍼했다. 배지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