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신상품은 큰 매력이 없다.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물건일수록 가치가 높아지니까. 골동품을 사고팔 수 있는 곳은 전국에 다양한데 서울에 인사동 거리가 있다면 부산에는 문현동 골동품 거리가 있다. 두 곳은 다른 지역 수집가들도 ‘원정’ 오는 명소. ‘신상’을 중요시하는 일련의 구매 흐름과는 달리 손때 묻은 전통이 지켜지는 귀중한 공간인 셈이다.

그런데 문현동 골동품 거리를 찾으려면 우선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부터 풀어야 한다. “조방 근처 썩은 다리를 지나라.” 난이도를 낮춘 단서는 다음과 같다.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주변에서 잘 보면 보인다.” 63층 초고층 빌딩이 위용을 뽐내는 그곳 어딘가에 ‘조방’이 있고 ‘썩은 다리’가 있으며 골동품 거리가 존재한다. 세 곳 모두 지도앱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단번에 검색할 수 없어 초행길이라면 찾기 힘들 수 있다. 부산 토박이들은 단박에 그곳이 어딘지 안다.

골동품 업체 ‘사오기’ 매장 바깥에 진열된 울트라맨 조각상. 홍정민 PD

●거리에 깃든 부산 근대사

골동품 거리가 있는 장소는 부산 근대사가 오롯이 녹아든 곳 중 하나다. 우선 조방은 동구 범일동 일대를 지칭한다. 부산 사람들 만남의 장소 중 하나인 ‘조방 앞’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기계제 면방직 공장이자 부산에서 가장 큰 회사인 조선방직주식회사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1968년 조선방직공장이 철거되고 시장과 건물이 들어섰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 일대를 조방이라고 부른다.

‘썩은 다리’를 건너려면 조방 인근에서 부산의 ‘청계천’인 동천부터 찾아야 한다. 부산진구 백양산에서부터 북항까지 이어지는 동천은 서면을 지나 부산진구와 남구 경계를 흐르다 부산항으로 빠진다. 동천을 건너는 다리 중 ‘썩은 다리’가 있는데, 정식 명칭은 무지개다리(범2호교)다. 썩은다리를 경계로 동구와 남구로 나뉜다. 다리는 처음에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오랜 세월을 견디며 비가 오거나 강물에 닿아 나무가 점점 썩기 시작해 썩은 다리란 별칭을 얻었다.

산업화 열풍에 무자비하게 오염된 동천의 ‘썩은 물’을 빗댔다는 설도 있다. 1998년 부산진구에서 다리를 새로 만들어 무지개다리란 이름을 붙여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을 썩은 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에서 BIFC가 있는 남구 문현동 쪽으로 골동품 거리가 시작된다.

동천 위 ‘썩은 다리’. 무지개다리란 이름이 있지만 처음 나무로 만들어져 다리가 썩은 것을 두고 여전히 ‘썩은 다리’라고 부른다. 홍정민 PD

골동품 거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골동품을 사고 파는 사람이 언제부터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인근 상인과 남구청 등의 말을 종합하면 10~20년 전 골동품 가게가 하나둘 이곳에 문을 열었고, 이들 주변으로 개인이 소장한 골동품을 사고파려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시장처럼 형성됐다. 현재 골동품 거리에는 20여 곳의 가게가 운영 중이며, 매주 일요일에는 ‘골동품 시장’도 여전히 열리고 있다. 추억 또는 전통을 사고팔기 위해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골동품 문화를 보존하고 확대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골동품 업체 ‘사오기’ 매장 바깥에 진열된 태권브이. 홍정민 PD

●‘최초의 울트라맨’이 이곳에 있다.

골동품 거리를 걷다가 사람들이 한 번은 멈추는 곳이 울트라맨 조각상 앞이다. 실제 울트라맨을 본뜬 것 같은 크기와 정교함이 시선을 압도한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 바로 옆에는 역시 성인 남성의 키만 한 태권브이 조각상도 있다. 이 조각상들을 소유한 골동품 업체 ‘사오기’ 강태성 대표가 “오가는 사람 대부분 이 조각상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웃었다.

6년 전부터 이곳에서 골동품 업체를 운영한 강 대표에 따르면 울트라맨 조각상은 동명의 영화가 1960년대 최초로 한국에 개봉될 당시 홍보용으로 제작됐다. 구리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일본에서 단 2점만 제작돼 한 점은 일본에, 한 점은 강 대표가 갖고 있다. 태권브이는 오래 전 여러 경로를 거쳐 어렵게 구한 조각상이다.

“이런 조각상은 얼마나 하나요.” 본능적인 질문에 강 대표는 “태권브이의 가격은 비공개, 울트라맨은 일본에서 300만 엔(한화 약 3000만 원) 정도를 호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을 아꼈다. 그는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그 가치에 맞게 판매한다. 손님이 차 사발을 들어 살펴보는 자세만 물건을 아끼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며 “또 골동품의 가치는 트렌드 등에 따라 달라진다”고 가격을 책정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사오기에는 이 밖에도 초기 건담 시리즈의 OST가 수록된 LP판, 1980년대 택시에 설치된 미터기, 지금은 찾기 힘든 1980~90년대 공중전화기, 현대자동차가 실제 자사의 자동차를 35 대 1의 비율로 축소한 자동차 모형 등이 빼곡히 진열돼 구경하는 재미를 높인다.

골동품 업체 ‘고당’에 진열된 21세기 이전 출시된 국산품들. 홍정민 PD

●롯데껌 삼총사 모신 ‘레트로 박물관’

어릴 적 집에서 썼던 냄비 밥솥 주전자를 세월이 흘러 다시 보면 누구나 추억에 젖는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욕구는 ‘레트로 열풍’으로 이어졌다. 인근 골동품 업체 ‘고당’ 2층 ‘근대사 자료실’은 비밀스러운 ‘레트로 박물관’ 같은 곳이다. 이곳 대표가 1960년대 이후부터 출시된 TV 라디오 가요책자는 물론 껌 조미료 설탕 등의 식품까지 원형 그대로 ‘박제’해 진열했다. 국산 제품만 모아 진열해 특히 익숙하다.

근대사 자료실의 비밀스러운 공간이 열리자 1980~90년대 주방이 툭 튀어나왔다. 노랗고 투박한 주전자, 유리가 아닌 플라스틱 주전자처럼 생긴 간장통 등이 과거 어느 가정집의 주방을 재현한 듯 실감 난다. 부산우유와 오란씨 등 음료 업체에서 출시한 ‘한정판 유리컵’들은 최근 레트로 열풍 때 일부러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인기 아이템. 알록달록한 원색의 제품들이 앙증맞고 정갈하다.

골동품 업체 ‘고당’에 진열된 다양한 껌들.

안쪽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당시 슈퍼마켓으로 무대가 바뀌었다. 다양한 아이템 중 눈길을 사로잡는 건 롯데에서 출시된 스피아민트 쥬시후레시 후레시민트 등 일명 ‘롯데껌 삼총사’ 초기 출시 모델들. 미개봉된 상태로 슈퍼 계산대에 진열된 그 모습 그대로다. 이 밖에 70원에 판매되던 삼양라면 봉지와 남양분유 통, 드봉비누와 랑데뷰 샴푸 등 21세기 이전에 출시된 추억의 물건들이 차례로 방문객을 맞는다.

한쪽에서는 1970년대에 출시된 금성 TV가 검정고무신을 상영 중이었다. 이곳 대표가 DVD와 연결해 화면이 나오도록 제품 성능을 유지한 덕분이다. 세기말 이전에 출시된 다양한 제품이 한자리에 모여 전체적으로 작은 ‘레트로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보존이 잘 돼 있고 종류가 풍부한 덕분에 이곳 물건 일부는 1980년대가 배경인 영화 ‘택시 운전사’ 촬영에 대여되기도 했다. 골동품 거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자세한 이야기는 영상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골동품 업체 ‘고당’ 2층 근대사 자료실에 진열된 제품들. 지금은 보기 힘든 과거 공중전화기 제품이 눈에 띈다. 홍정민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