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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 오순환 |
가을비가 내려요.
'톡톡톡토독토독'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나뭇잎이 몸을 흔들어요. 나뭇잎은 이제 초록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아나 봐요. 미련을 갖지 않고 노랗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요.
'주르르르'.
엄마가 갈색 커피 잔에 뜨거운 물을 부어요. 커피 잔에서 하얀 연기가 소르르 피어나요. 어느새 향긋한 커피향이 집안 구석구석 퍼져나가요.
엄마는 오늘도 첫사랑이 그리운가 봐요. 커피 잔을 들고 비 내리는 창 밖만 보고 있으니까요.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나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줘요. 아마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거예요.
"시은아, 첫사랑은 영원하지 않는 거야…."
말끝을 흐린 엄마의 눈가엔 이슬이 촉촉이 맺히겠지요.
엄마는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그 때 엄마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고아원에서 사는 줄 알았대요.
고아원을 나온 첫 날.
이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엄마에게 성큼 다가왔어요. 순간, 엄마는 혼자라는 사실이 두려워 울고 또 울었어요.
고아원 원장님이 소개시켜준 공장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낯선 사람들, 매캐한 고무 냄새, 눈이 따가운 실내 공기.
엄마는 그 속에서 말이 없는 사람으로 점점 변해 갔지요. 그러면서 잦은 어지럼증에 시달렸어요. 일을 하는 도중에도 몇 번씩 쓰러졌으니까요.
엄마의 병명은 악성 빈혈이라고 했어요. 엄마는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날도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하나, 두울…."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헤아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어요.
"똑똑똑."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안경 낀 청년이었어요.
"저…."
손에 검정색 가방을 든 청년은 눈만 끔뻑거리며 말을 더듬었어요.
"보험… 회사에서 나왔는데…."
청년의 눈은 바닥을 향한 체 가방만 만지작만지작 거렸어요. 엄마도 눈만 끔뻑이며 안경 낀 청년을 바라보았어요.
창밖에는 가을비가 계속 내렸어요.
청년은 다음 날도 엄마 병실 문을 두드렸어요.
드디어 청년이 결심한 듯 말을 꺼냈어요.
"저… 보험에 드셨어요? 새로운 보험이 나왔는데, 입원 첫 날부터 입원비가 나오고…."
엄마는 청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그 이후로도 청년은 엄마 병실을 찾아와 같은 말을 되풀이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은 함박 웃으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고맙습니다! 드디어 제가 보험 계약을 한 건 했습니다."
엄마는 청년과 같이 함박 웃어 주었어요.
청년은 보험 회사 직원이었어요. 숫기가 없는 청년이 보험 일을 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지요. 청년은 엄마 병실을 찾아와 보험 상품 설명하는 걸 연습했어요. 엄마는 말없이 가만히 들어주었고요.
엄마는 자기 일에 열심인 청년을 마음 속에 담기 시작했어요. 청년은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준 엄마가 고마웠어요.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워졌어요.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따뜻하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았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어떤 마음인가를요.
엄마는 파란 하늘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볼을 건드리면 나뭇잎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길을 가다 뒷모습이 같은 사람을 보면 가슴이 콩닥거렸어요. 사람이 햇살처럼 반짝거릴 수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어요.
엄마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어요.
엄마는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마음속에 따뜻한 난로를 품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어요. 난로가 가슴 속에 있으면 뜨거울 텐데도 말이에요.
엄마와 청년은 결혼을 약속했어요.
청년은 열심히 보험 일을 하고 엄마는 옷 파는 가게에 취직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힘이 되어 주었어요.
그러나 엄마에게 마음속 난로는 사치였나 봐요. 청년은 울산에서 보험 계약을 하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엄마의 난로는 꺼져 버렸어요. 바로 엄마의 첫사랑이 끝나버린 거예요.
그 이후로 엄마는 마음속 난로를 피우지 않았어요.
아침에 비가 내리면 청년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때를 떠올려요. 밤에 비가 내리면 난로가 꺼져 버린 때를 기억해요.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한다고, 엄마는 항상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외로움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고요.
나는 가끔씩 엄마를 보면서 외로움의 노예가 뭔지 알 것 같아요.
아직도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요.
엄마가 들고 있는 커피가 싸늘히 식어버렸어요. 엄마는 비가 내리면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첫사랑을 마시나 봐요.
'후후!'
지금부터 셋을 세고 나면 엄마는 뒤돌아 설 거예요. 그리곤 이렇게 외칠 거예요.
"자, 이시은! 학교 가야지. 엄마는 회사에 가서 열심히 일하고!"
그러면서 방긋이 웃을 거예요. 보험 서류가 든 검정색 가방을 들고서 말이에요.
나는 가방을 들고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보며 말할 거예요.
"아빠, 학교 다녀올게요."
그럼 청년도 나를 보며 빙긋이 웃어줘요.
"그래, 잘 다녀와. 비 오는 데 차 조심하고!" 나도 조용조용 내리는 가을비가 좋아요.
'톡톡톡토독토독'
나뭇잎 하나가 노란 우산 위로 떨어져요. 엄마가 앞서서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어요.
이 가을비가 그치면 엄마의 마음속 난로가 다시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어요.
동화작가 - 정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