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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오순환 |
마이 네임 이즈 헨키. 복지관 무료영어교실에서 처음 배웠던 문장. 난 이 문장을 익히자마자 거리로 달려나와 외쳤다. 이 말을 알아들을 외국인이 우리 동네에는 많으니깐. 인근에 공단이 위치해 그곳에서 엄마도 한때 일을 했었으니까. 내가 외치면 외국인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환하게 웃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내 이름이 헨키가 아니라 현기라는 것은 까맣게 모를 때였다.
현기라 불리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다. 헨키라고 친구들이 놀리면 현기라고 불러달라고 주먹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현기라고 우겨도 현기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해서 이제는 헨키라는 이름이 좋다. 현기는 혀를 억지로 말아 발음해야 한다. 하지만 헨키는 그냥 혀에서 굴러 나온다. 어머니가 헨키라고 불렀듯이, 헨키하고 읊조리면 이름 속에서 엄마 냄새가 난다.
내 꿈은 격투기 선수다. 방과후면 무슨 일이 있어도 태권도 도장만큼은 빼먹지 않는다. 물론 동네에 격투기 도장이 있었더라면 태권도 도장으로 찾아가진 않았을 것이다. 내 꿈을 말했을 때 친구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내 꿈은 어머니가 사라지던 날부터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물론 처음에는 도장을 기웃거리는 나를 사범선생님까지 이상하게 보았다. 그러나 심부름을 하고 허드렛일을 도와주자 청강생이라는 어려운 말을 쓰면서 나를 받아주었다. 덕분에 난 도장 구석에서 눈치껏 품새를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집에 가면 본격적인 훈련을 나 혼자 또 한다. 집에 가봤자 TV빼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작년에 할머니까지 하늘나라로 가시자 집은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멀리 일을 나간 아버지는 언제 올지 모른다. 아마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소 싸움꾼이나 개 사육장에서 일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집에 올 때마다 술을 마시고 그릇과 가구를 던지다가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즐겨 보는 것이 격투기 중계다. MBC ESPN이나 XTM에서 방영하는 K-1이나 프라이드경기를 볼 때마다 신난다. 신이 나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솟는다. 물론 그게 엄마 때문이란 걸 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격투기 중계를 보면서 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복지사 누나는 확실히 내 친구다. 누나는 정기적으로 우리 집을 방문한다. 올 때마다 나와 제법 긴 시간을 놀아주기도 한다. 해서 누나에게만은 내 꿈을 말해주었다. 누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망울을 키웠다.
"정말이라니깐요. 난 학교에서도 싸움꾼으로 소문이 짜한 걸요."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럼 먼저 이 머릿속부터 채워야 하지 않겠니?"
물론 누나의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누나밖에 없다. 덕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효도르라는 것도 누나는 알고 있다. 아마 늙은 담탱이였다면 장래의 챔피언이 될 내 명민한 머리통을 몇 번이나 쥐어박았을 것이다. 아무리 잡종새끼, 튀기, 우즈베키스탄백곰이라 불러준 버릇을 고쳐주려 한 것뿐이라고 말해줘도 말이다.
사실, 내가 아무리 거울을 봐도 다른 친구들과 달라 보이는 점은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나를 놀린다. 차이점이라고는 엄마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뿐. 더군다나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한국사람이었다고 해도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심지어 담탱이는 껄껄거리며 농담까지 건넸다.
"그래, 맞다. 지금이야말로 일제시대다. 샤프 하나도 일제가 아니면 안 쓰니깐 말이다."
담임의 농담에 비아냥거리는 뜻이 없음은 안다. 그러나 난 선생님의 말을 믿지 않는다. 코끼리 사건이후로는 더더욱. 0.1톤짜리 코끼리가 나를 찾아온 건 점심 때였다. 녀석이 나타났을 때 난 직감했다. 코끼리파가 가만있지 않으라는 걸. 그러나 내 잘못은 없었다. 나를 에어리언이라고 놀린 데 대한 대가를 지불했을 뿐이다.
"네가 그 유명한 격투기 선수란 놈이냐?"
코끼리의 말에 잠시 가슴이 떨렸다. 내 자리 옆에 선 녀석의 그림자만 봐도 작은 산 하나를 옮겨놓은 것 같았다. 녀석이 담탱이처럼 내 영리한 챔피언 머리를 툭툭 때리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코끼리를 '테이크 다운'시킬 자신도, '암바'도 '니바'도 걸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서 녀석을 아버지라 여기기로 작정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이 꼬이고 말았다.
"에어리언을 퇴치하는 방법을 난 알지. 다음에 또 우리 파를 건드리면 네 머리에 살충제를 들어부을 거다. 알았냐?"
에어리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불쾌감이 급상승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난 녀석의 물컹거리는 뱃살을 물고 늘어져버렸다. 살점에서 피가 배어 나올 즈음 녀석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싸움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담탱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너 정말 싸움꾼이 될 작정이냐?"
무릎 꿇고 앉은 내게 담탱이가 물었다. 내 꿈은 싸움꾼이었으므로 당연히 예, 하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탱이는 내게 다시 물었다.
"그럼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싸움꾼이겠구나."
"예, 엄마의 나라 우즈베키스탄도 한때 효도르의 나라였거든요."
선생님은 웃었다. 그러더니 내가 제일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아. 부모님께 알려야겠다."
수화기를 든 채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 연락처를 대."
계속 다그치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라요."
"왜 몰라?"
"도망갔으니까요."
담탱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빛으로 보아 엄마가 도망간 이유라도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담탱이의 눈치만 살폈다. 얼마 뒤 담탱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엄마를 두들겼다. 음식도 제대로 못하고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병신이라면서 패고 또 팼다. 아버지가 벌건 얼굴로 나타날 때면 엄마는 부들부들 떨었다. 심지어 해질녘이면 엄마의 몸이 먼저 떨었다. 그런 어머니가 끝내 나를 두고 사라지고 말았다.
"됐다. 이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지루하게 끌던 담탱이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담탱이도 내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나는 싸움의 소질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어스름이 깔리는 운동장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는 코끼리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렸다. 마치 발전기라고 집어삼킨 것 같았다. 그런 코끼리마저 큰길에서 사라지자 갑자기 격투기 경기를 보지 않는데도 엄마 생각이 났다. 거리는 어느새 퇴근하는 사람들도 붐비고 있었다. 저 거리 어딘가에 엄마가 숨어 있다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때마침 일을 마치고 거리를 나온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그 사람들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피잉 솟았다. 마치 그들이 형 같고 누나만 같았다. 해서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눈동자를 키웠다.
"마이 네임 이즈 헨키."
일행은 일제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지들끼리 뭐라고 쑤얼렁거리더니 가던 길을 재촉했다.
"마이 네임 이즈 헨키!"
등 뒤에 대고 외쳐도 그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내 말을 받아준다면 얘기하려 했다. 내가 격투기 선수가 되려는 진짜 이유를. 그건 엄마 때문이라고. 내가 아버지를 이기지 못하면 정말 나의 엄마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현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입에서는 마이 네임 이즈 헨키라는 말만 맴돌았다. 동화작가 - 이상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