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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오순환 |
나? 냉장고야. 냉장고. 별명이냐구? 아니.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 냉·장·고라고. 내가 뭐라고 불리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런데 왜…? 아, 내가 말하는 게 이상하다구? 근데, 말이란 게 별건가 뭐. 내가 사는 집 식구들은 고양이하고도 이야기하며 살고 있는 걸 뭐. 말이란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에만 통하는 것은 아니잖아. 차이가 있다면 나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 그래서 어떤 땐 내가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나도 할 말이 무지 많은데, 그럴 기회가 없다는거야. 가끔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보기는 하지만, 말만 좀 할라치면 내가 낡았다느니 고물이라느니 하는 통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느냐, 아버지 어머니는 누구시냐, 사람들은 그렇게 물어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그러고 보니,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 같기는 해. 중요함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이 연장되거나 혹은 단축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얼마 전, 여보 이번에 새로 나온 양문형 냉장고가 맘에 들던데라고 주인 아주머니가 중얼거리자, 지금 냉장고 바꾸는 게 뭐 그렇게 중요해. 돈 들어갈 일이 얼마나 많은데, 라는 아저씨의 말에 간신히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하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빼먹을 순 없겠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가나 보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냉장고란 상품으로 만들어져 내가 전시된 곳은, 부산의 부전동시장이란 곳이었어. 그곳이 '나까마'시장이라고 불린다는 걸 안 것은 한참 후였지. 그 말이 도매시장이라는 말과 비슷하다는 것과, 돈이 급한 대리점들이 손해를 보고 내놓은 제품 등등 나름의 사연을 가진 제품을 싼값에 취급하는 시장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 근 한달이 되어서야,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나를 선택한 거야.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곳이 바로 18평짜리 서민아파트였어. 막 이사를 왔는지, 나와 다른 모습을 지닌 녀석들, 세탁기며 텔레비전이며 이런 친구들이 이미 도착해 있더군. 그 때, 다른 친구들의 시샘을 좀 받기는 했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포장을 벗기더니 이것저것 물건들을 막 채우기 시작했어.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주인아주머니의 사랑이 각별했지. 한동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별 이유도 없이 만지고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이 고달파지기 시작했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주인집 아들 녀석이 막 걸어다니기 시작할 때부터였어. 녀석은 심심하면 내 속을 벌컥 열고, 그냥 내버려 두는 통에 힘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나마 날씨가 차가울 때는 나았어. 여름만 되면, 여남은 번은 냉동실을 여닫는 바람에 온몸의 힘이 몽땅 빠져나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기도 해. 어떤 땐 아예 내 속을 벌려 놓은 채 유치원에 가버리는 통에, 거실의 온기까지 감당해야하는 날도 있었어.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
그러고 보니 냉동실이라는, 내 안의 묘한 공간에 대해서 한마디 안할 수가 없겠네. 얼음을 얼리는 냉동실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놓고, 왜 차게 만드는 기능만을 의미하는 냉장고란 이름을 붙였는지, 모두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 놈의 묘한 공간 때문에 여름만 되면 죽을 지경이야. 우유팩에 담긴 채 식지않은 곰탕국물까지 얼려야 할 때는 신세한탄이 절로 나와. 게다가 생명이 다한 갖가지 물고기들이 냉동실에 채워질 때, 그땐 정말 미칠 지경이야. 녀석들이 내뿜는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말을 하다보니 불평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네. 나름의 보람도 있었다는, 혹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를테면, 주인 아저씨가 저녁을 먹은 다음 '캬, 시원하다. 내가 이 맛에 산다'는 말과 함께 맥주를 들이켤 때야. 기왕이면 '냉장고 너 덕분이야'는 말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제사를 지낸 후 남은 밥을 냉동실에 얼렸다가 전자레인지인가 하는 친구의 힘을 빌어 다시 먹을 수 있는 밥으로 만들어 놓고 '너무 편리한 것 있죠. 이런 게 생활의 지혜라니깐'하면서 흐뭇해하는 아주머니의 반응을 볼 때도 마찬가지지. 냉장고, 정말 고마워. 이 한마디 하기가 왜 그리 힘드는 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주인 아주머니가 비닐로 둘둘 싼 푸른색 종이들을 냉동실 깊숙이 넣었더랬어. 그런데 며칠 후 냉동실 구석까지는 좀체 살피지 않던 아저씨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참을 뒤지더니 예의 그 종이들을 발견하고는 환호를 지를 때만해도 나까지 기분이 좋았어. 보물찾기라도 한 걸까. 나중에야 그게 몰래 감춰 둔 비상금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크게 한 번 싸우고 난 뒤의 일이야. 그 때 기분이란 정말 묘하더군. 덩달아 흐뭇해하다가 얼마 가지않아 큰 죄라도 지은듯한 그 기분. 주인집 아들 녀석이 종종하던 말처럼 정말 기분 꿀꿀하더군.
뭔가, 할 얘기가 분명 있었는데, 맞아 그 얘길 못했네. 시골에서 올라 온 할머니 얘기. 주인 아저씨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주인 아주머니에게도 어머니가 되는, 하여간 어머니라고 부르는 할머니였어. 어머니, 제발 이곳저곳 뒤지고 청소하고 그러지 마시고, 제발 이번에는 그냥 편히 쉬시다 가세요. 아저씨의 말에 그래, 알았다. 이번에는 손도 꼼짝 안한다. 약속을 했어.
그런데 그 할머니는 거짓말쟁이인 것 같아.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 꼬맹이까지 모두 나가고 나니, 한참동안을 텔레비전만 멀뚱히 바라보던 할머니가 무슨 생각에선지 이방 저방을 다니더니 내게로 왔어. 그리고 문을 열더니, 냉장고만 믿었다가 다 상하지. 듣기 거북한 말을 하더니,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쫘악 쏟아내고는 걸레로 닦아내고, 하나씩 다시 채우기 시작했어. 무엇보다 시체같은 냄새를 풍기던 귤과, 검은 물까지 흘러나오던 큰 파들이 나가고 나니 살 것 같더군. 그리고는 마늘을 찧어 네모 모양으로 만들어 은박지에 담은 조각들을 열개도 넘게 쌓아놓고는 그 밑에 작은 봉투를 하나 까는거야. 난 또 겁이 났어. 틀림없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다시 싸우게 될 터인데.
역시 예상대로더군. 할머니가 시골로 내려간 며칠 뒤, 주인 아주머니의 음성이 커지기 시작했어. 이번에는 웬일로 옷장도 찬장도 안 뒤졌다 싶었네. 이번에는 냉장고를 아주 이 잡듯이 뒤지셨구만. 거 말 조심해. 이 잡듯이 뒤지다니. 대체 왜 그러는가 싶어 아저씨가 나를 활짝 열었어. 깨끗하게 정리만 잘했구만 뭐. 누가 좋대나. 보여주기 싫은 것도 있단 말이야.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만히 계시면 누가 뭐래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깨끗하게 정리 된 내가 싫다니. 썩은 시체 냄새가 나서 내 안의 모든 것들이 함께 썩어가도 좋단 말인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던지 할머니가 애써 쌓아 놓은 은박지에 싼 마늘들을 헝클어 버렸어. 뭐야, 소꿉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 이건 뭐야. 당신이 넣은 거야.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어. 또 싸움을 할 건가 보다. 이게 뭐야, 부적이잖아. 아들 꺼, 며누리 꺼, 손자 꺼. 거 봐. 당신 탓하려고 그런 건 아니잖아. 그냥, 아들 며느리 생각해서 그러신거야. 아주머니가 조용한 게 오히려 이상했어.
나는 냉장고야. 차게 만들거나, 얼게 만드는 것을 주로 취급하지만 가끔은 그런 것과 상관없는 지폐나 요상한 그림 따위도 보관하는 만능냉장고야. 그렇더라도 한가지만은 명심했음 좋겠어. 나를 믿고 너무 오래 야채나 과일을 맡겨두면 그 속에서 상할 수도 있다는 것과, 사랑이 담기지 않은 물건들은 사양하겠어. 괜히 나만 입장 곤란해. 그리고 정말 이 얘기는 하고 싶어. 당신들의 서늘함과 시원함을 위해서 누군가는 몸 한 곳을 데워가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는 사실과, 이 세상에서 인간들과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의 말과 생각이 있다는 것. 오늘 얘기는 여기서 끝.
소설가 - 옥 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