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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21> 토끼와 사루비아

앓아 누운 봉철이 머리맡에 피어 있던 사루비아를 잊을 수 없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6-11-30 10:20:35
  •  |   본지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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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오순환


1.

나는 어린 시절 뒷집을 참 좋아했다. 뒷집에는 꽃이 많았다. 텃밭과 마당 여기저기 온갖 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심지어 겨울철에도 방안에는 많은 화초들이 있었다. 뒷집에는 무엇보다 내 동무 봉철이가 있었다. 봉철이 하면 떠오르는 것은 사루비아 꽃이다.

건강과 안전과 치료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사루비아는 '불로장생'의 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봉철이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앓아 누운 봉철이 머리맡에 피어 있던 사루비아를 잊을 수가 없다.

2.

첫눈이 내렸다. 산과 들이 온통 흰눈으로 하얗게 덮였다. 해마다 우리 마을에서는 첫눈이 오는 날 마을 아이들 모두가 뒷산으로 토끼몰이에 나선다. 국민학교 6학년 땐가. 그 해 따라 첫눈이 늦어 크리스마스 무렵에 온 것 같다.

오래 기다린 첫눈이 오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는 코흘리개부터 코밑이 가무스름한 중학생까지 그야말로 동네 아이들 총동원이었다. 아이들은 당시 많이 불렀던 맹호부대 노래를 부르면서 줄지어 뒷산을 올랐다.

토끼는 생각보다 매우 재빠르기 때문에 어른들도 여간해서는 잡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동네 아이들의 숫자가 많다해도 무턱대고 몰아붙이다간 놓치기 십상이다. 토끼몰이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야 하고, 몰이꾼들의 자리를 잘 배치해서 한꺼번에, 그리고 산 위에서 아래쪽으로 몰아야 한다 것 등이다. 마침 우리 마을 뒷산에는 솥처럼 오목한 골짜기가 있어 토끼몰이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날도 동네 아이들은 산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소리를 지르며 토끼를 몰아갔다. 어디선가 우리들의 소리에 놀란 토끼가 튀어나오길 바라며 꼭, 자기 손으로 잡겠다는 듯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토끼닷! 중턱쯤 내려왔을 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포위대열을 갖추었다. 모두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한 방에 때려 누일 각오로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었다. 토끼는 아이들의 어루는 소리와 몽둥이에 어쩔 줄 몰라 이리 저리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우리의 포위망이 점점 좁아져 토끼가 바야흐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한 토끼가 내 쪽으로 왔다. 나는 이때다 싶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토끼는 용케 피해 방향을 바꾸었다. 그 쪽에 있던 아이 역시 몽둥이를 내리쳤다. 몇 차례 토끼는 잘 피해 다녔지만 포위망을 뚫지를 못했다. 그러자 거의 기진맥진한 토끼가 갑자기 옆에 있던 뒷집 동무 봉철이 쪽으로 덤벼들었다. 봉철이는 순간 뒤로 움찔 물러났다. 그 틈을 이용해 토끼는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에이, 빙씨 새끼!"

"누-꼬?"

봉철이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봉철이는 그해 겨울 내내 동네 아이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

3.

이듬해 삼월 나는 대구로 진학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왔다. 봉철이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시골에 있는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몇 달 뒤 주말을 맞아 고향에 가니 봉철이가 아프다고 했다. 그를 찾아갔다. 마당 여기저기에 작약과 모란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지만 방안에는 이상하게도 가을철에나 볼 수 있는 사루비아꽃이 피어 있었다. 앓아 누워 있는 동무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그 꽃이 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픈 그를 위해서 그의 어머니가 정성스레 키워놓은 것이리라.

기운이 거의 빠져 핏기 없는 잿빛 얼굴에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영락없는 연약한 토끼의 모습이었다. 봉철이는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나를 무척 부러워했으나 나는 그런 동무를 위로해 줄 뚜렷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그의 머리맡 화분에는 사루비아 꽃잎 몇개가 떨어져 내렸다. 사루비아 꽃잎은 무척 달콤했다. 운동회 무렵 달리기 연습을 하다 지치고 배고프면 우리는 같이 그의 마당으로 와서 붉은 꽃잎을 따서 진한 단물을 많이도 빨아 마셨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왠지 그 달콤하고 아름다운 꽃이 자꾸만 슬프게만 느껴졌다.

내가 그만 일어서려는데 봉철이가 말했다.

"니도 날 겁재이로 생각하노?"

"니가 와 겁재이고?"

그것은 불쌍한 동무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평소 캄캄한 밤에도 산길을 혼자 다닐 정도로 담력이 있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 때 말이다. 내가 토끼에게 물러 선 것은…"

사실 나도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깟 토끼에게 겁먹는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토끼의 눈을 보았어. 너무 불쌍하더라…"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때 자꾸만 봉철이가 토끼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구로 왔다. 며칠 뒤 학교에서 송충잡이 가는 날 봉철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봉철이는 좇기는 토끼의 눈에서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른다.

4.

당시에는 송충이가 전국적으로 극성을 불릴 때였다. 그래서 대도시 학교 학생들도 인근 야산으로 송충이를 잡으러 나서야 했다. 우리는 송충잡이 집게와 누런 종이 봉투 하나씩 들고 시외 야산으로 갔다. 나는 비교적 높은 곳에서 송충이를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 골짜기 부근이 소란스러웠다. 토끼가 한 마리 발견되었다. 징그러운 송충이를 잡기 싫어하던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놀이감이 생긴 것이었다. 그 순간 거의 모든 아이들이 송충이를 잡던 통이랑 집게를 팽개쳐버리고 토끼몰이에 나선 것이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축제 같았다. 아무리 날랜 토끼지만 온 산에 퍼져 있는 수 백 명의 아이들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멀리서 구경하던 나는 문득 뭔가 가슴이 아릿함을 느꼈다. 봉철이가 생각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토끼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 때까지 잡았던 송충이와 송충잡이 집게 던져 버리고 토끼 쪽으로 달려갔다. 토끼가 있는 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내 얼굴에 뾰죡한 솔가지가 긁히고 솔가지에 붙어 있던 송충이가 부딪쳐 쏘아도 개의치 않고 달렸다. 어떻게 하던지 불쌍한 토끼를 살려야 했다.

그러나 내가 달려갔을 땐 이미 늦었다. 토끼의 모습은 처참했다. 토끼를 잡아 공을 세우려는 아이들이 서로 가지려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찢겨져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다시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또 다른 토끼가 발견된 것이었다. 가까이 있던 아이들 몇몇이 그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다행히 그곳은 아이들 무리로부터 다소 벗어나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아이들이 몰고 있는 토끼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그들이 좁혀 가던 포위망을 허물어버렸다. 토끼는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쳤다.

"누우꼬!?"

"언놈이얏!"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좋았다. 만세를 부르고 싶을 만큼 가슴이 후련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도망치는 토끼는 큰놈이 아니라 새끼 토끼였다. 아마 아이들에게 발각이 되자 어미가 새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수많은 아이들 앞에 노출시킨 것이었다. 그 날 나는 더 이상 송충이를 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겁쟁이라는 아이들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사루비아꽃 옆에 누워 있던 봉철이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 박 명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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