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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33> 할머니와 운동화

늙은이 짐작으로 잘 고른다고 골랐는데…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7-02-22 18:52:46
  •  |   본지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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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오순환
온종일 눈이 내리다가 그친 설날 밤입니다.

얕은 잠에 들었던 할머니는 이상한 소리에 스르르 눈이 떠졌습니다.

"이건 내 꺼다!"

"흥! 돼지 앞발처럼 뭉툭한 네놈 발엔 너무 헐렁헐렁하잖아."

"돼지 앞발? 그럼 네놈 발은 개가 열흘 씹다 버린 쉰 뼈다귀다! 네놈이 신으니 아예 훌러덩 벗겨지는구나!"

누가 이 한밤에, 그것도 남의 집 마당에 들어와 싸우는 게야…… 몇 시간이나 차에 시달리며 내려와 이제야 곤히 잠든 아들네가 깰세라, 할머니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갔습니다.

마루로 나온 할머니의 눈에 참말이지 별난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어린애처럼 작달막한 사람 둘이 운동화 한 짝씩 부둥켜안고서, 서로 다른 한 짝을 뺏으려 밀고 당기는 겁니다.

"뭘 하는 게야? 그건 내 손자 신발인데!"

할머니가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둘 다 화들짝 놀라 할머니를 쳐다봅니다.

에구머니나! 둘을 마주본 할머니도 화들짝 놀랐습니다. 짚단같이 부스스한 머리, 둥그렇고 퀭한 눈, 추워 보이는 맨발에 넝마 같은 옷차림…. 게다가 신발 한 짝씩 부둥켜안고, 갑자기 주인 만난 밤손님처럼 찔끔해 있는 꼴이라니. 마치 옛날 얘기로 들었던 설날 밤에 내려와 신발을 훔쳐간다는 도둑 귀신같은 모습이구먼. 할머니는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이 뭐더라 뭐더라….

둘 중에 좀 더 큰 쪽이 용기가 났는지 가슴을 쭉 펴고 거들먹거립니다.

"깜짝 놀랐잖아, 할멈. 우리는 양괭이님이시다."

그래, 양괭이!

"마침 잘 나왔어. 이 찰거머리가 자꾸 억지를 부리니까 할멈이 내 편 좀 들어줘. 할멈도 눈이 있으니 알겠지? 요 신발은 멋지고 잘생긴 내 발에 딱이란 걸!"

그러자 작은 양괭이가 크흥 크흥 코웃음을 칩니다.

"할멈 눈이 비뚤어지지 않았으면 내 발에 딱이라고 알아볼 거다. 그렇지, 할멈?"

신발을 훔치다가 들켜놓고선, 미안해하긴커녕 오히려 누구 발에 어울리나 심판을 봐달라니…… 뻔뻔해라! 할머니는 체를 내다 걸어 양괭이들을 쫓아버릴까 싶었습니다. 양괭이들은 체구멍을 세는 데 푹 빠져 새벽이 오는 것도 모르다가, 첫닭 소리와 함께 허겁지겁 쫓겨 간다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양괭이들의 맨발이 맘에 걸려 물었습니다.

"너희 신발은 어쩌고 남의 걸 훔치러 다니는 게야?"

그러자 양괭이들이 눈을 끔뻑끔뻑했습니다.

"그게 궁금하면 우리가 왜 양괭이가 됐는지부터 들어야 돼."

양괭이들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양괭이는 세상에 살 때 제 욕심만 채우고 다른 사람을 헐벗게 한 죄, 못살게 한 죄로 되는 귀신입니다. 제 죗값을 치르느라 양괭이는 늘 헐벗고 배고픕니다. 특히 어떤 신발이든 양괭이가 신으면 너무 커져서 훌러덩훌러덩 벗겨지거나, 꽈악 덫처럼 조여들어 아프거나, 앞뒤를 거꾸로 신은 것처럼 불편하거나 하지요. 그러니 양괭이들은 땡볕이나 눈밭에도 맨발로 다니거나, 신발 때문에 눈물이 쏙 빠지게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해에 딱 하루, 설날 밤만은 양괭이도 제대로 된 신발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날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 신으면, 신이 뒤틀리지도 작아지지도 커지지도 않아서 한 해를 편하게 보낼 수 있는 겁니다. 옥황상제가 양괭이들을 가엾게 여겨 이날 하루만은 너그럽게 봐주는 거지요. 설날은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로 더없이 좋은 날이니까요.

"그러니까 오늘 꼭 신발을 찾아야 한다구!"

양괭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는 흐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 신발은 못 가져간다."

"뭣?!"

"그건 내 손자 운동화야. 게다가 너희 발에도 너무 크잖아."

할머니는 양괭이들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벽장에서 종이상자 하나를 꺼내 왔습니다.

"이 중에서 골라봐라."

종이상자를 열자 색색의 운동화 여러 켤레가 곱게 포개어져 있습니다. 그걸 보고 양괭이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손자 손녀 주려고 산 것들이야. 장에 나갔다가 우리 강아지들 줘야지 하고. 그런데 늙은이 짐작으로 잘 고른다고 골랐는데…. 내려오길 기다려서 신겨보면 요 녀석들 키도 발도 쑥쑥 커서 너무 작다지 뭐냐. 요즘 애들은 눈 깜짝할 새 훌쩍 큰다니까…."

"할머니. 너무 작아요."

운동화에 발을 들이밀다 말고 쓴웃음 짓던 손자의 얼굴이 아른아른합니다.

"엄마 용돈이나 쓰시지 괜히 돈을 쓰고 그래. 그렇잖아도 쟤 운동화 남아도는걸."

미안한 마음에 더 툴툴대던 딸의 말도 귓가에 다시 울리는 듯 합니다.

나도 알지……. 딸과 마주앉은 것처럼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그저 바쁘게 열심히들 사는 게 고맙고 기특할 뿐입니다. 하지만 가끔 볼 때마다 젊은 나무처럼 몰라보게 훌쩍 큰 아이들 모습이 할머니는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라는 모습을 못 본 것이 꼭 보물을 놓친 듯 아쉬운 것입니다. 결국 한 켤레 변변히 신겨보지도 못할 걸, 미련하게 꽁꽁 싸두고만 있었구먼. 할머니는 속으로 한숨을 불어냈습니다.

"너희 발에 맞으면 신고 가도 좋다. 어차피 주인 없는 신발이니까."

양괭이들은 흥분해서 콧구멍을 벌름벌름했습니다.

"진짜 우리 주는 거야?"

"선물이야?"

이 신 저 신 신어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 꼭 새 물건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 같습니다. 운동화 하나에 이리 팔짝팔짝 뛰는 것이 귀엽기도 짠하기도 했습니다.

선물을 받아서 좋으냐? 많이 기뻐하거라. 그래야 그 마음 간직했다가 다른 사람한테 좋은 일도 해주지.

마침내 자기 발에 딱 맞는 걸 골라 신은 양괭이들이 이리 저리 걸어 보입니다.

"할멈. 우리 모습이 어때?"

"그래, 어때?"

"좋구먼. 아주 푹신하겠다."

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양괭이들도 아이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었습니다.

신발을 얻은 양괭이들은 이윽고 검푸른 하늘로 별처럼 날아갔습니다.

종이상자엔 이제 신발 두 켤레 자리가 비었습니다. 가만 그 자리를 내려다보던 할머니가 부드럽게 중얼거렸습니다.

"두 놈은 임자를 찾았구나. 나머지도 어서 제 임자를 찾아야지……."

신주선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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