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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살던 신불산 계곡. 호랑이 서식지를 추적하던 상북 주민 이상일 씨가 '호식바위'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다. |
- 감시·사냥 관군 척호갑사 궤적 좇으니
- 산 곳곳 물어죽인 짐승 뼈·묘비 흔적
- 호피 탐낸 일본인 엽총에 자취 감춰
- "10년전 호랑이 봤다" 목격담 나오기도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신불산 척호갑사에게도 총포소지금지령이 내려졌다. 척호갑사(捉虎甲士)란 호랑이의 출몰을 감시하고 발자국을 추적하는 관군으로, 조선조 초기부터 양성됐다. 그들은 조선 땅이 완전한 왜인 속국이 되면서 관직을 잃고 토박이 포수가 되어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목매를 치는 홀치기로 연명을 하였다. 떠돌이 시인은 척호갑사가 쫓던 호랑이를 추적해 보기로 하였다. 바닥을 기는 사람이 아쉬운 시대, 백수의 제왕이라는 호랑이와 정면승부를 걸었던 담력 좋은 척호갑사를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호랑이는 영물이라 스무 살 밑에 보지 못하면 평생을 못 본다고 한다. 운 좋게 주운 새끼 토막에 황소만 한 호랑이가 달려올 줄 모른다는 기대감도 없잖아 있었다. 떠돌이 시인이 척호갑사와 신불산 호랑이를 찾아 출발한 곳은 소가천 저수지가 보이는 신불재 들머리였다.
■신불산 호랑이를 쫓는 척호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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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무덤 앞에 세워진 '영호영세불망비'. 이 무덤은 상북 능선의 야트막한 야산에 있다. |
떠돌이 시인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던 신불산을 향해 내쳐 올랐다. 호랑이가 만찬을 즐겼던 고장산 '호식바위'와 신불재 '김도령 바위'를 돌아본 후, 신불산 단조봉 용머리에 올라 산하를 우러러보았다. 한때 호랑이가 호령했던 천화현 불등(하늘억새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축을 흔드는 호랑이 울음소리에 숨을 죽였던 울창한 산천초목은 호랑이가 살기에 적합해 보였다.
그동안 떠돌이 시인은 신불산 호랑이의 서식처가 될 만한 곳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누비고 다녔다. 새가 울어도 무서운 간월산 저승골, 일 년 내내 볕이 들지 않는 폭포골, 능동산 '입석바위', 재약산 칡밭, 문복산 마당바위, 억산 소매골, 범봉 딱밭재(딱발재), 운문산 호거바위 등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은 곳으로 알려졌다.
신불산 호랑이는 근동 100리를 설치고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닥치는 대로 물어 죽였다. 배내골에서 대처로 나오는 통로였던 신불재 '김도령 바위'에는 뼈가 무더기로 널렸었고, 살티 주민은 호랑이 밥이 된 천주교인의 머리통을 능동산 '입석바위'에서 찾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운문산 '호거바위'에서는 상투 머리가 발견되는 등 도처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호랑이가 사회 문제가 되면 척호갑사가 출동하여 호랑이를 사냥하였다. 척호갑사의 우두머리 격인 산행장(도포수)은 사냥을 지휘하였고, 포수들은 척호갑사의 엄한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짐승을 발견하면 오뉴월 서릿발 눈깔로 변하는 자욱포수, 뚝심과 배짱이 두둑한 목포수, 끈기가 있는 몰이포수, 그리고 산짐승을 잡아 입살이를 하는 토박이 포수 등이 화승총을 매고 호랑이를 추적하였다. 기록에는 울산 방어진 목장에 근무하던 척호갑사가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 특별 승진을 한 기록과 호랑이를 소탕한 척호비(捉虎碑)가 세워져 있다.
■배내골에서 잡은 황소만한 신불산 호랑이
한편, 신불산 비알에는 호랑이를 목격한 주민이 많았다. 2002년 9월 문복산 마당바위에서 호랑이와 마주쳤다는 손영택(76) 씨의 목격담은 생생했다. 문복산 기슭에서 버섯을 따던 손씨는 불과 30m 떨어진 마당바위에 누워 있는 호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를 본 손씨는 몸과 입이 얼어붙어 소리를 지르지도 발을 뗄 수도 없었다고 한다. 호랑이는 불을 보면 도망을 간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라이터 불을 켜자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상북 고을에 사는 강창회(84) 씨의 이야기 역시 그럴싸했다. 해방되기 직전인 1944년이었다. 이(李)씨 성을 가진 배내골 숯장이 영감이 멧돼지를 잡으려고 설치해 둔 올가미에 검은 줄 테 선명한 호랑이가 걸려 주암계곡 물가에 죽어있었다는 것. 고기가 그리운 가난한 산간오지 사람들은 올가미를 쳐두기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호랑이가 목매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숯장이 영감이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소문이 나 사람들이 자꾸 구경을 오게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산짐승을 잡으려면 주재소에 수렵 신고를 해야 했는데, 포수가 아닌 숯장이가 호랑이를 잡게 되자 주재소 순사가 출두 명령을 내렸다. 겁을 집어먹은 숯장이 영감은 흰 무명 두루마기 차림에 패랭이를 쓰고 주재소에 출두하게 되었다. 황소만한 호랑이를 동네 장정 넷의 목도로 석남사 신작로까지 나르는데 쩔쩔매었다고 한다. 죽은 호랑이를 산판 차에 옮겨 싣고 주재소로 간 숯장이 영감은 다행히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났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호랑이를 구경하려던 사람들로 주재소 앞마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호랑이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거적에 덮여 있는 신불산 호랑이를 목격한 강 씨는 "죽은 호랑이가 벌떡 일어날 것 같아 담력 약한 사람은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고 기억했다. 함께 죽은 호랑이를 본 김정두(86) 씨는 "호랑이 눈썹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감기가 안 온다 하여 눈썹을 뽑아 늘 지갑에 지니고 다녔더랬다"라고 했다. 울산경찰서로 실려 간 신불산 호랑이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일본인 사냥꾼 설치면서 신불산 호랑이 사라져
신불산 비알은 호사(虎事)가 많은 곳이기도 했다. 상북 능산 정려각 옆에 있는 호랑이 무덤은 신불산 일대의 호사를 입증해 주는 좋은 예이다. 상북면사무소로 가는 지방도의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있는 무덤은 평범해 보이지만 예사로운 무덤이 아니다. 필자가 뺏장 벗겨진 무덤가로 다가가자 '영호영세불망비(靈虎永世不忘碑)'를 지키던 독사가 세모진 대가리를 쳐들어 접근을 막았다. 막대기로 독사를 쫓아내고 수풀을 뒤지니 '영호지총(靈虎之塚)'이라는 호랑이 비석이 나왔다.
신불산에서 호랑이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무렵이었다. 엽총을 든 일본인 사냥꾼들이 총질하면서부터 신불산 호랑이는 멸종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호피에 탐을 낸 일본인 사냥꾼들은 사냥개와 몰이꾼을 동원하여 호랑이, 표범, 여우, 족제비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신불산 일대에서 2대째 사냥질을 했었던 김진동 포수는 신불산에 왜놈 사냥꾼이 설치면서 호랑이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사냥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일본인 사냥꾼이 맹수에게 물려 죽는 사고가 빈번하면서 속절없는 호랑이만 아주 결딴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악한 표범만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12월 22일 운문산 상봉(上峰)에서 최종용 포수가 잡은 '가지산 표범'이 이를 증명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