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가 군항 만들며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 8개길 교차로 내 시가지 만들어 곳곳에 일제시대 흔적 남아있어

- 러시아영사관 영향 받은 진해우체국
- 문예 사랑방 역할 했던 흑백다방에다
- 이승만 전 대통령 왔다 간 원해루까지
- 100년 전 그 거리에 내가 서 있는 듯

소통에 목말라서일까. 도시의 골목길을 걷는 것은 강한 중독성이 있다. 정담을 나누듯 대문을 마주하고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걷노라면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현관문만 닫으면 각자 세상이 되는 아파트 숲이 넓어질수록 골목길에 대한 애착은 커진다. 골목길은 수평적 공간에만 뚫려있는 게 아니다. 도시의 오늘을 잉태한 근대로도 이어진다. 골목길을 걷는 것은 그래서 100년의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근대골목 기행'을 떠난다. 느릿느릿 근대골목을 누비다 보면 현대의 모순을 해결할 교훈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흑백다방-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중원로터리변에 자리한 다방. 1955년부터 진해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해왔다.

■러시아풍 건물 진해우체국

첫 번째 근대골목 기행지로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중원로터리 일원을 선택했다. 진해는 일제가 군항을 건설하면서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인데, 이곳이 시가지의 중심지여서 근대의 풍경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일대는 구한말 웅천현 서면 지역으로 '중평 한들'이라 불리는 넓고 기름진 벌판이었다. 일제는 1912년 이곳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낸 뒤 당시 수령 12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를 축으로 사방에 8개의 길을 내어 방사상 시가지를 만들었다.

팽나무는 오래전 말라죽어 제거했고, 1970년대 그 자리에 분수대와 시계탑을 세웠다가 지금은 잔디광장으로 대체됐다. 일제강점기 진해는 한국인에게는 주거권을 주지 않는 일본인만의 도시였다. 시가지의 면적은 39만6000여 ㎡로, 5만 명이 살 수 있는 규모였다. 시가지 조성 과정에서 중평리 등 11개 마을이 철거됐고, 주민들은 황무지(현재 경화동)로 밀려났다.

	1920년의 중원로터리 일대 모습. 중앙의 팽나무를 축으로 시가지가 건설됐다.

기행은 지난 11일 중원로터리변에 있는 '진해우체국(국가 사적 제291호)'에서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1912년 지은 이 단층 목조건물은 대지 이용방법과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삼각형 모양의 대지(2085㎡)에 맞춰 짓다 보니 꼭짓점에 위치한 출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구조가 됐다. 출입구가 좁은 단점을 보완하려고 양측에 토스카나 양식의 배흘림 기둥을 세워 당당한 인상을 자아냈다.

햇빛을 많이 받아들이려고 지붕에 반원형 채광창을 설치해 건물 사용 효율성과 조형미를 높인 것도 눈길을 끈다. 학계에서는 건축양식을 러시아풍으로 보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겨 일찌감치 진해만 군항 설치를 포함한 한반도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한 일제가 왜 러시아풍의 건물을 지었을까? 학계에선 진해와 가까운 마산에 러시아영사관이 있었던 영향으로 추측한다. 1899년 마산포가 개항된 뒤 그 배후지에 러시아 일본 등 각국의 공동조계지가 설치됐다. 러시아영사관은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포초등학교에 세워졌는데, 전면에 베란다가 있는 마산 최초의 2층 목조건물이었다. 조계지 내 러시아인의 건물은 모두 6동으로, 그중 하나는 260㎡ 규모의 호텔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해 문화 사랑방 흑백다방

	진해우체국- 1912년 지은 러시아풍의 우체국. 출입문의 배흘림 기둥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일제가 러시아풍의 건물을 지은 이유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진해우체국보다 14년 늦게 건립된 진해역 또한 일본식이 아닌 북서유럽풍인 점을 미루어 볼 때 일제가 선진국들을 따라잡기 위해 건축양식 등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게 나을 듯하다. 진해우체국 김용근 서무팀장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제가 무기를 생산할 자원이 부족해지자 진해우체국의 지붕과 난간에 사용한 동판과 동재를 징발한 뒤 아연으로 바꿨으나 1984년 원래대로 복원했다"고 말했다. 진해우체국은 1985년 신청사를 짓기 전까지 사용됐다.

시선을 정반대편으로 옮겨보자. 진해우체국에서 직선으로 중원로터리를 가로지른 곳에도 주목할 만한 근대건축물이 한 채 있다. 진해우체국과 같은 해에 지어진 일본식 2층 목조 건물로, 현재 시민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흑백 다방'이다. 이곳은 지난 60여 년간 진해의 문화예술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건축면적이 107㎡에 불과하지만, 이름처럼 흰색 벽면에 검은색 창틀과 현관문틀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연륜과 무게감을 표출한다.

함남 북청 출신의 유택렬(1924~1999) 화백이 1955년 인수해 다방을 운영하면서 이곳은 명실상부한 지역문화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유치환 김춘수 전혁림 문신 등 당대의 쟁쟁한 예술인들이 여기서 문화 담론을 펼쳤다. "군항제가 열리면 많은 사람이 찾아와 커피를 마시고, 반백의 노신사가 부인과 함께 들러 그때를 추억하기도 하며,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마음을 추스르기도 하는 '흑백'을 어찌 사라졌다 하겠는가. 진해의 문화예술인 치고 흑백의 자양분을 먹지 않고 자란 이가 있겠는가?" '진해 문화의 등대, 흑백다방'이라는 글에 나오는 회고담이다.

정일근 시인의 시구를 보면 그 존재감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 로터리에서/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 다방이여'. 흑백다방은 식민지의 유산을 활용해 성장의 발판으로 삼은 모범 사례라 할 만하다.

	군항마을역사관- 350여 점의 기록물 등 중원로터리 일대 근대문화유산 자료가 전시돼 있다.

흑백다방 맞은편에는 진해군항마을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350여 점의 기록물을 비롯해 중앙동 일대 근대문화유산에 관한 모든 자료가 전시돼 있다. 2013년 국가기록원은 중앙동을 '기록사랑마을'로 지정했다. 이 역사관 역시 1920년 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 건물이다. 일본식 건물 사이에 중국풍의 근대건축물도 있어 이국적인 풍취를 더한다. 흑백다방 뒤편에 들어선 음식점 '수양회관'이 그곳이다. 1920년대에 세워진 팔각 누각의 3층 건물로, 지붕 끝이 송곳처럼 뾰족해 '뾰족집'이라 부른다. 본래 중원로터리를 건너 반대편에 같은 모습의 건물이 한 채 더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사라졌다.

■현대도시 진해 어떻게?

	원해루-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개석 전 대만 총통이 회담을 마치고 식사한 곳으로 유명하다.

수양회관과 마주 보고 있는 중국음식점 원해루(옛 영해루)는 한때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6·25전쟁 직후 중공군 포로 출신의 귀화인이 일본식 건물을 개조해 문을 연 이 음식점은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개석 전 대만 총통이 회담을 마치고 식사를 했던 곳이다. 1984년 음식점을 인수한 뒤 상호를 바꿔 운영 중인 박재기(여·81) 씨는 "마산·창원·진해 지역에서 가장 큰 중국 요릿집이었는데, 지금은 쇠락해 이름만 남았다"며 씁쓸해했다.

일본식 건물들 가운데 옛 진해요항부 병원장 관사(현 선학곰탕·국가 등록문화재 제193호)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ㄱ'자 형태로 현관이 돌출된 이 단층 목조주택의 응접공간은 서양식인 반면 주거공간은 일본식이다. 인근 장옥(長屋·대로변 상점들) 거리에는 6채의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일제가 도시계획을 세워 짓게 했던 주상복합건물이다.

	장옥거리- 현재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지은 일본식 주상복합건물 6채가 남아 있다.

진해 기행의 종착점은 중원로터리에서 700m가량 떨어진 진해역이다. 1926년 일제가 진해군항으로 드나드는 군수물자를 수송하려고 진해와 창원을 잇는 철도 진해선(21.2㎞)을 건설하면서 지은 것으로, 진해우체국과 함께 진해 근대건축물 중 가장 흥미로운 건물이다. 지붕에 창이 나 있는 점이 특히 그렇다. 차로 쪽 역무실 위와 철로 쪽 대합실 위에 각각 2개의 창이 설치돼 있다. 진해역이 모방한 북서유럽 건축물 구조의 특징이다.

유럽은 알프스를 기준으로 남유럽과 북서유럽으로 나뉘는데, 건축물 구조도 판이하다. 눈이 오지 않는 남유럽은 지붕이 평평하지만, 눈이 잦은 북서유럽은 제설 편의를 고려해 지붕을 경사지게 만든다. 그로 인해 생기는 지붕 아래 공간을 활용하고자 다락방을 설치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붕에 창을 내게 됐다. 지붕창은 미관상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밋밋한 지붕에 조형 변화를 주는 데다, 창을 통해 하늘과 별을 볼 수 있다는 낭만성까지 보태지기 때문이다. 이는 진해의 딱딱한 군사 이미지를 완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진해역- 1926년 군수물자와 군인 수송을 위해 건설한 철도 진해선의 관문이다.

진해역은 역사(203㎡)에 비해 광장(17만여 ㎡)이 기형적으로 크다. 무려 840배를 넘는다. 군수물자와 군인 수송 등 군사적 목적으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5년 여객 취급이 중지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역사의 문은 닫혀 있다. 광장은 텅 비었고, 철로 역시 활기를 잃은 채 녹슬어 가고 있다. 빈 광장과 철로는 근대도시 진해에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인 듯하다. "그곳에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진해를 보다 평화로운 현대도시로 만들 수 있는가?" 그 답을 찾는 건 우리의 몫이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