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전기 스승 점필재 문하서 만나
- 14살 차이에도 절의로 우정 키워

- 함양→산청→천왕봉→하동 14박15일
- 마지막 날 뱃놀이 때 詩 한수씩 남겨
- 둘 다 무오사화 연루돼 세상 등져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 맹자(孟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이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일 뿐이다. 장삼이사에게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필요성도 없다. 그러니 삼락의 내용을 현실적으로 수정해 보면 어떨까. 세 번째 항목을 '뜻 맞는 친구와 명승지를 유람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거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동정호. 동정호는 면적이 0.15㎢에 달하는 반원형 호수다. 정여창과 김일손은 지리산 유람의 마지막 날 이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며 시를 지었다. 누각은 악양루.

비록 이 제안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해도, 지기와의 유람은 간절히 바라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도 그랬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두 사람은 14살의 연령 차이를 뛰어넘어 도의로 굳게 맺어진 정신적 벗이었다. 그 우정은 일두를 도학의 사표로, 탁영을 사관의 표상으로 이끌었다.

그런 그들이 평생 소원하던 지리산을 유람한 뒤 각자 한 수씩 시를 지었다. 후세에 전해진 일두의 유일한 시이자, 몇 편 안 되는 탁영의 시문 중 하나다. 간신들의 무고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일두의 시문 대부분이 소각되고, 탁영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에 무엇을 담았을까? 지난 18일 작시의 현장을 찾아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정호와 화개면 악양정으로 갔다.

■도의로 맺은 정신의 벗

	악양루 반대편에서 본 동정호.

일두와 탁영이 만난 것은 1480년 탁영이 17세 때 밀양에서 여묘살이하던 점필재의 문하에 들어가면서다. 일두는 8년 앞서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점필재와 사제의 연을 맺었다. 탁영은 "내가 본래 남들을 인정하는 경우가 드문데, 나이 열일곱에 비로소 점필재 어른의 문하에 나아가 마음이 통하는 벗 열세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며 그 중 일두를 '도덕의 벗'으로 꼽았다.

왜 탁영은 일두를 도의의 모범으로 삼았을까? 1490년 7월 사섬시정 조효동(趙孝仝)이 성종에게 올린 '학행으로 천거하는 상소'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상소문에 따르면 일두의 나이 18세 때 함경도 병마우후 벼슬을 하고 있었던 그의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李施愛)와 싸우다 숨졌다. 일두는 전장으로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함양)에 모신 뒤 삼년상을 지냈다. 조정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의 아들'이라며 군직을 내리자, "아버지가 패해 목숨을 잃었는데 아들이 그 영광을 받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면서 고사했다.

	악양정.

1486년 여름에는 일두의 고향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성균관에 머물다 일시 낙향한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전염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했다. 그러다 10여 일 만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남들이 전염병에 걸릴 것을 우려해 꺼리던 장례를 예법대로 치렀다. 이 일을 관찰사가 듣고 관을 마련해주려 하니 "백성들을 고생시켜 널을 마련하면 필시 원망이 어머니께로 돌아갈 것"이라며 사양했다.

조효동이 일두의 효행과 학문을 칭송하며 천거하자, 임금은 이를 받아들여 일두에게 소격서 참봉을 제수했다. "어미의 초상을 치르며 안으로 애통해하는 마음이 부족하면서 겉으로는 슬퍼하는 모습을 지어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효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으니 이는 사람들을 기망한 것이며, 나라에 전해져 포상으로 관직이 내려졌으니 이는 국가를 기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두는 사양 상소를 올렸다. 마침 그해 12월 일두는 문과 별시에 급제했다. 당시 예문관 검열로 재직하던 탁영은 "나를 대신해 사관의 직책을 담당할 자는 일두뿐"이라며 일두를 자신의 자리에 천거해 성사시켰다.

일두와 탁영의 지리산 유람은 이 일이 있기 1년 전인 1489년 4월에 이뤄졌다. 함양에서 출발해 산청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 뒤 하동으로 내려오는 14박15일의 장기여행이었다. 마지막 날 그들은 악양호(현 동정호)에서 뱃놀이를 하며 시를 지었다. '바람결에 부들잎 살랑살랑 흔들리고(風蒲獵獵弄輕柔·풍포엽렵농경유)/사월 화개땅엔 벌써 보리 익었네(四月花開麥已秋·사월화개맥이추)/두류산 천만 봉우리 다 구경하고(看盡頭流千萬疊·간진두류천만첩)/외로운 배 타고 다시 큰강 따라 내려가네(孤舟又下大江流·고주우하대강류)'.

일두의 시다. 지리산(두류산)을 둘러본 그는 산보다 물에 더 끌린다. 그는 탁영과의 대화에서 "어진 자는 산을,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는 바이지만, 산은 공자(孔子)께서 '물이여, 물이여(水哉水哉·수재수재)'라고 탄식한 것만 못하다"고 했다(탁영 '두류기행록'). 이 글귀는 '맹자' 이루하편에 나온다. 서자(徐子)가 "어째서 공자께서는 물을 취하셨습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근원이 좋은 물은 밤낮 그치지 않고 흘러 구덩이에 가득 찬 뒤에 전진해 바다에 이르니, 학문에 근본이 있는 자가 이와 같다"고 답한다. 일두가 물을 중시한 건 근본에 대한 천착이었다.

■지리산에서 섬진강으로

	악양정 소나무.

반면 탁영의 마음은 물보다 산에 가 있다. '푸른 물결 드넓고 노 젓는 소리 부드러운데(滄波萬頃櫓聲柔·창파만경노성유)/소매 가득한 맑은 바람은 가을 같구나(滿袖淸風却似秋·만수청풍각사추)/고개 돌려 다시 두류산 보니 참모습 아름다운데(回首更看眞面好·회수경간진면호)/한가한 구름은 자취도 없이 산을 지나가네(閒雲無跡過頭流·한운무적과두류)'. 15일간 발이 부르트도록 구석구석 누비며 온몸으로 흡수했던 지리산의 호연지기가 하산 후 동정호에서 배를 타면서도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듯하다.

탁영의 산 사랑 역시 근본 지향적이라는 점은 일두와 다를 바 없다. 산을 더 좋아하느냐, 물을 더 좋아하느냐는 취향일 따름이다. 근본을 꿰뚫지 못하면 세상에 도의를 펴기도 어렵다. 이런 이치는 동정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동정호는 평사리 앞 악양천이 범람하면서 만들어졌다. 반원형인 호수의 면적은 0.15㎢에 달한다. 호수에는 각종 동식물이 서식해 생태계의 보고로 각광받고 있다.

마을 쪽 호안의 중앙에 '악양루'라는 이름의 누각이 서 있고, 건너편 호수가 끝나는 지점부터 멀리 산 아래까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마을 뒤쪽과 좌우에도 산이 우뚝우뚝 솟아 진을 치고 있다. 호수와 들판이 산에 빙 둘러싸인 분지다. 호수는 분지의 구심체다. 산 나무 하늘 구름 등 주변의 모든 사물을 받아들여 그림자로 띄운다. 서로 감싸 안고 스며드는 조화로운 공존이다. 일두의 물과 탁영의 산이 도의라는 근본에서 만나는 것처럼 만물은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진리를 동정호의 풍경은 웅변한다.

	섬진강에서 재첩을 채취중인 주민들.

동정호에서 6㎞가량 떨어진 곳에는 일두가 18년간 은거하며 학문을 강론하던 악양정이 있다. 악양정 앞에는 전북 진안·장수군의 접경지대인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강기슭에 은빛 모래톱을 쌓으며 굽이져 흐른다. 관리인은 "정여창 선생 생존 당시에는 악양정에서 강이 보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은 앞에 건물이 많이 들어서 안 보인다"며 아쉬워했다. 수령이 400년 가까이 됐다는 허리 굽은 소나무만이 담장 밖으로 가지를 내뻗고 강이 보였을 시절을 회상하는 듯했다.

탁영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발생하기 전 '취성정부(聚星亭賦)'를 지어 일두에게 보여준다. '당고의 화가 일어난 것은(黨錮禍作·당고화작)/환관을 높이고 믿었던 탓이라(崇信刑餘·숭신형여)/삼백 년간 길러 온 인재들을(三百年儲養之人才·삼백년저양지인재)/초개만도 못한 듯 보았으니(視草芥之不如·시초애지불여)/천하는 장차 몰락하려 하고(天下將溺·천하장닉)/사해는 거센 파도가 일어(四海奔波·사해분파)/손 내밀어 구원하려 하나(側手欲援·측수욕원)/또한 앞날을 어찌 하리오(亦將奈何·역장내하)'.

'당고의 화'는 중국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환관들이 전횡을 일삼자, 관료와 태학생들이 힘을 합쳐 대항했다가 되레 무고를 당해 600여 명이 처형되거나 금고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취성정부는 탁영이 무오사화를 예견하고 쓴 시다. 항우가 죽인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점필재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훈구파가 세조의 단종 살해와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글로 왜곡할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하지만 탁영은 이 글을 성종실록 사초에 넣고 사관의 도리를 다했다. 일두도 절의를 지키며 유배지에서 숨졌다. 그 후로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도의는 지리산과 섬진강처럼 여전히 푸르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