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중심의 역사관 바로잡기에 평생을 바쳤던 신채호 선생

- 김부식의 삼국사기 정면 비판하고 존화사상 뿌리 된 유교 증오해
- "분서갱유 때 다 태워버렸어야…"

- 한학의 대가이면서 빼어난 시인
- 6살 때 지은 한시, 생가에 전시돼


"그의 필봉이 향하는 자리에는 정(正)과 사(邪)가 저절로 밝혀졌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사학에 대한 평가다.

이런 평가는 재능에 안주하지 않는 부단한 노력에서 기인한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만주 일대 고구려의 옛땅을 직접 답사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단재는 역사 연구의 목표를 사대주의 극복과 민족 주체성 확립에 두었다. 극복 대상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였다. 우리 고대사를 왜곡한 중국사를 그대로 추종했기 때문이다. "집안현의 (고구려) 유적을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단재의 발언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의 역사 연구는 비아(非我·일본)에 맞서 아(我·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항일투쟁이었다. 단재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숨지기 전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 열정은 오늘날 민족사학으로 뿌리내렸다. 지난달 19일 단재의 자취를 찾아 '한시 기행'을 떠났다. 성균관 박사를 지낸 한학의 대가인 단재는 빼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낭성천 절벽에 세워진 백석정. 1677년 건립된 고령 신 씨의 정자다.

■"존화는 정신적 노예"

여행은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 있는 단재의 생가에서 시작했다. 그의 조부는 문과에 급제해 정언 벼슬까지 했지만, 부친 대에 와서 가세가 몰락해 단재는 이곳에서 콩죽으로 연명하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생가에는 1만2300여 ㎡의 대지 위에 안채와 곳간채 등 2채의 초가가 들어서 있다. 1992년 발굴을 통해 확인한 집터를 기초로 복원한 건물들이다. 집 뒷산에 소나무가 우거져 분위기가 정갈하고 아늑했다.

안채 마루 위에 놓인 안내판에 두 수의 시가 적혀 있었다. 단재가 6세 때 지은 시로, 그의 타고난 시재를 짐작게 했다. '이른 아침 써레와 쟁기 지고 들로 나가네(朝出負而氏·조출부이씨)/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論去地多起·논거지다기)'. 상형문자인 한자의 특성을 잘 활용한 시어 선택이 기발하다. 써레를 '이(而)' 자, 쟁기는 '씨(氏)'로 표현했다. 또 '논(論)'은 '논 답(沓)' 자, '거(去)'는 '밭갈 정(町)' 자의 음역이다. 시에 회화성과 음악성을 곁들여 생동감을 더했다.

	단재 신채호

단재는 8세 되던 해인 1887년, 생가에서 76㎞가량 떨어진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 마을로 이주했다. 광해군 때 신요(申撓)라는 사람이 상소했다가 귀양살이를 한 뒤 은거한 곳인데, 인조반정 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않아 마을에 '곧은 이'란 뜻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단재의 묘소와 사당, 기념관이 있다. 단재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시신이 왜놈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한 뒤 재를 바다에 뿌려라"고 유언했으나, 후손들이 이곳으로 모셨다.

기념관 앞에 세워진 시비의 시가 일제에 대한 단재의 적개심과 애국심을 전해준다.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吾知鼓天鼓者·오지고천고자)/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其能哀而怒矣·기능애이오의)/슬픈 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哀聲悲怒聲壯·애성비노성장)/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喚二千萬人起·환이천만인기)/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乃毅然決死心·내의연결사심)/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光祖宗復疆土·광조종복강토)/섬 오랑캐 피를 깡그리 긁어모아(取盡夷島血來·취진이도혈래)/우리 하늘북에 피칠을 하리라(其釁於我天鼓·기흔어아천고)'.

	낭성면 고드미 마을에 있는 단재 사당.

단재는 19세가 되어 성균관에 입교하면서 이곳을 떠났다. 성균관에서는 조소앙 등과 역신 이하영 무리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는 등 서서히 항일투사로 변해 갔다.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탄 4개월 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문에서 논설위원으로 일하며 활발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08년 대한매일신문에 연재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는 이미 존화(尊華)사관을 "한국인을 정신적 노예로 만드는 역사관"이라고 비판하는 등 확고한 민족주의 의식이 드러나 있다.

■유교도 철저히 부정

	단재 신채호의 생가.

사대주의에 물들게 한 유교도 철저히 부정했다. "허튼소리 본시부터 육경에서 비롯된 것(浮虛之自六經開·부허지자육경계)/진시황 불 한 번 질렀네(快付秦家一炬灰·쾌부진가일거회)/한스럽다 그날에 못다 태우고(却恨當時燒未盡·각한당시소미진)/한나라 조정에 복생 있음이(漢庭猶有伏生來·한정유유복생래)'. 복생은 진시황이 불태운 유교경전 중 '상서'를 외웠다가 후세에 전한 인물이다. 유교의 폐단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컸으면 복생을 원망했을까.

이런 생각은 중국과 김부식의 역사 기술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발전한다. 당 태종의 사망과 연개소문의 당 정벌에 관한 조선상고사의 기록을 한번 보자. 당 태종은 고구려 장수 양만춘이 쏜 독화살을 눈에 맞아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화살통 속에 든 한 물건일 뿐인데(謂是囊中一物耳·위시낭중일물이)/흰 깃에 눈 떨어질 줄 어찌 알았으랴(那知玄花落白羽·나지현화낙백우)'. 고려 말의 학자 목은 이색이 읊은 관련 시다.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天秋大膽楊萬春·천추대담양만춘)/화살 쏘아 당 태종의 눈알 뺐네(箭射虯髥落眸子·전사규명낙모자) 조선 후기의 학자 노가재 김창업은 그 사건을 적시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동국통감 등 사책에서는 당시 전황을 기록하면서 겨우 '당서'의 기록을 초록했을 뿐 이런 말이 전혀 없다. 이는 사대주의파 사가들이 외국에 대한 우리의 승리 기록들을 모두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단재에게 포착된 우리 사가들의 사대주의 행태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금 북경시 조양문 밖 7리쯤에 있는 황량대를 비롯해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 황량대라고 이름 붙은 지명이 10여 곳이나 된다. 전설에 따르면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은 뒤 양곡창고라고 속여 고구려 군사들이 쳐들어오면 복병을 숨겨놓고 공격했다는 곳이다. 이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다." 단재는 하지만 삼국사기 등 우리 사서에 이 사실도 보이지 않는다고 통탄했다.

	단재 묘소.

단재는 그 이유를 김부식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조선사는 조선의 강토를 바짝 줄여 대동강 혹은 한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조선의 제도·문물·풍속·습관 등을 모두 유교화해 삼강오륜의 교육이나 받으며, 정치란 것은 오직 외국에 사신 다닐 만한 비열한 외교사령이나 감당할 정도의 사람을 양성해 동방군자국의 칭호를 유지하려 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1135년 발발한 묘청과 김부식의 서경 전쟁에서 묘청이 패한 것이 그 배경이다. 화랑·불가 대 유가, 국풍파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에서 후자가 이긴 뒤 계속 사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조선 역사상 1000년 이래 최대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조선상고사는 단재의 옥사로 백제 멸망에서 저술이 중단됐다. 북벌진취사상의 시대 변천, 태고부터 발생한 지방자치제 정신의 소멸 원인 등 그가 당초 기획한 관심 사안들은 묻혀버렸다. 하지만 이를 아쉬워하고만 있을 처지가 아니다. 단재가 제기한 문제들도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미 오래전에 김부식과 이병도를 위시한 우리나라 사대주의 사학자들과 식민사관 사학자들이 다 해놓은 것을 지금에 와서 공론화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조선상고사 번역자의 서문 글귀가 눈에 꽂힌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