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왕국 시대(BC 377~AD 1017년)에서 불교의 전성기는 7세기쯤이다. 그 시기 670년대 무렵 고구려 현유(玄遊) 스님은 중국, 인도(천축), 스리랑카(사자국)의 세 지역으로 불교 순례 길을 떠난다. 스님의 순례 길은, 그 무렵 인도와 스리랑카로 간 스님(14명)의 기록과 함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중국 승려 의정·691년), ‘해동고승전’(고려 승려 각훈·1215년), ‘삼국유사’(고려 승려 일연·1281년 편찬)에서 전해진다. 그 가운데 스리랑카로 구도의 길을 간 단 한 사람이 현유 스님이다.
당시 중국 산둥성에서 구도생활을 하던 스님은 스승 승철과 함께 바닷길로 스리랑카를 거쳐서 인도로 간다. 아마 산둥성 청도에서 출발한 스님은, 당시 인도로 간 최초의 신라 스님 아리야발마의 행로와 같이 가릉국(보로부두르 사원이 건립되어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 사자국을 거쳐서 갔을 것이다. 그 험난한 항로를 헤치고 싯다르타(붓다)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부다가야(Buddha Gaya)를 비롯한 불교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스님이 다시 스리랑카로 갔다가 인도로 되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추구하는 자기만의 깨우침(自利)을 얻고 난 뒤 중생들의 깨달음(利他)을 보시하기 위해서 인도로 다시 와서 불법을 전했던 것일까. 그래서 후세에 고승의 전기를 쓴 승려들은 스님을 ‘자리와 이타에 마음을 두고 법을 전하여 널리 알려 명성은 잊히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일까.
나만을 위한 이익과 다른 사람도 함께 나누는 베풂은 서로 함께 어울려야 살아날 수 있다고 스님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말을 듣지도 않았다. 말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말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