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잘못을 물을 법정은 없다'고 ‘군주론’에 쓴 바 있다.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2018)는 이 명제에 화답하는 듯한 영화이다. ‘킬링 디어’(2017)에서 파국을 맞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미국의 중산층 가정을 다룬 바 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8세기, 영국 왕실의 은밀한 밀실로 눈을 돌린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가부장이 집안에서 벌이는 파시즘적 상황을 다루었던 감독은 아예 실존 인물인 앤 여왕(Queen Anne·1665~1714)의 사생활을 들추며 군주와 권력에 대한 또 한 편의 우화를 빚어내고자 한다.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의 목줄을 쥐고 사실상 실권자로 행세하는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레이첼 와이즈)는 자신의 하녀로 들어왔지만 여왕의 총애를 얻어 새로운 측근으로 부상하는 애비게일(엠마 스톤)의 도전에 직면한다. 이 삼각관계의 치정극에 사랑 따위 낭만적 수사가 끼어들 틈은 없다. 두 사람이 진정으로 갈구하며 구애하는 건 여왕 개인이 아니라 그 몸에 함축된 권력이다. 왕정 국가에서 권력은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 사회적 필요나 역할에 따라 분배되지 않는다. 권력은 최고 지도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가에 따라서 부여될 따름이다. 사라는 전시(戰時)의 통치를 위해서, 애비게일은 신분 상승을 위해서, 저마다의 이유로 여왕의 총애를 필요로 하며 연극을 벌인다.
‘더 페이버릿’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사인화(私人化)된 상황에서 이를 둘러싼 인간 군상의 심리가 어떻게 뒤틀리고 분열되는가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영화가 빚어내는 아이러니의 정점은 앤 여왕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대영제국의 지배자가 목발 없이는 거동하지 못하는 반신불수에 자제심 없는 어린아이처럼 변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역설이 또 어디에 있으랴? 왕실은 모든 질서의 근원으로 자리 잡았고, 국회는 오로지 여왕의 재가 아래서 국정을 수행할 수 있지만, 정작 통치를 수행해야 할 여왕의 심신은 무너진 상태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여왕은 허수아비일 뿐 실세는 자신이라 여기며 쟁탈전을 벌인다. 그리고 결말에 다다를 즈음 일대 반전이 일어난다.
사라가 여왕의 고삐를 쥐고 있을 때 사육장에 가뒀던 애완용 토끼들이 애비게일이 여왕의 환심을 사면서부터 창살에서 풀려난다. 이는 여왕이 사라의 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었음을 암시하며 토끼는 곧 여왕과 동일시된다. 토끼를 품에 안으며 여왕의 환심을 사려던 애비게일은 귀족 신분을 회복한 뒤엔 토끼의 목을 슬며시 짓밟는다. 그러나 온순해 보이는 토끼의 본성이 실은 흉포한 맹수이듯, 사라의 속박을 끊어낸 앤 여왕은 권력의 무자비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애비게일에게 성적 행위를 강제하며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왕의 표정은 클로즈업된 애비게일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과 토끼 무리에 포개진다. 이 다중 노출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전달한다. 권력을 쥐고 있다고 착각한 자야말로 실은 권력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설, 그리고 제약받지 않는 권력은 사회구성원에게 고통과 희생, 굴종을 감수하도록 강요한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괴물이 된다. 이것이 권력의 진실이라고 란티모스는 비꼰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