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짠시따 왕이 1105년 건립
- ‘같은 사원이 생기지 않도록’
- 사원을 지은 8명의 승려를
- 완공 후 살해한 것으로 유명
- 사원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 그 황금빛 첨탑에 새겨진
- 450여 개의 붓다형상 주위로
- 끝없는 탑돌이를 하게 된다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 남방불교 국가들에 산재해 있는 성지 순례를 단체나 개인으로 하더라도 언제나 그 초점은 붓다(體)보다는 불상(相)이나 가이드의 해설, 사찰 건축(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출가(出家)를 하지 않더라도 단 며칠이라도 가출(家出)하여 염불보다는 잿밥을 즐기는 것이 여행의 재미가 훨씬 더 좋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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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한 성전이 되기를 바라면서 1105년에 건립한 아난다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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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만난 전통 신앙
일주일을 머무르면서 이리저리 쏘다니는 동안, 도시 바간은 모든 불교경전에 처음으로 시작하는 글귀, 아난다(Ananda) 존자의 ‘이렇게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를 ‘이렇게 나는 보았다’(如是我見)로 바꾸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에서도 벗어난다고 가르치는 것 같았다. 반드시 걸어 다니면서 불교 유적을 다 둘러보리라는 욕심(貪)은 길과 길 안내판, 무더위와 휴게소, 유적지와 해설 게시판, 안내인 및 현지인과 여행자 등이 자기의 분노(嗔)를 부채질하는 어리석음(恥)에 깊이 빠지게 만든다. 욕심,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게스트하우스 게시판에 걸린 다른 여행자의 메모지다. 그 메모지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아난다 사원(Ananda Paya)으로 가는 길의 안내도 그 자체이다.
메모지의 안내에 따라 사원으로 가려면 가장 먼저 도시의 수호신에게 예를 표해야 삼독의 정화가 이루어질 것 같아서, 동남쪽 출입구 타라바 더가(Tharabar Gate)로 향한다. ‘화살에 대한 보호막’을 뜻하는 그 출입구 안에는 전통 신앙 낫(Nat)인 ‘위대한 산의 제왕’ 마하기리(Mahagiri), 그 누이 ‘황금의 얼굴’ 흠마와니(Hnamadawgyi)의 사원이 있다. 참배객들은, 마하기리와 흠마와니가 고대 더까웅 왕조(Tagaung Kingdom·BC 850~483년)에서 역모의 죄로 화형을 당했다가 탈리까웅 왕(Thallligyaung·344~387년)의 자비로 도시의 수호신이 되었듯, 과거를 사죄하며 자비가 베풀어지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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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다 사원. |
■유일 성전 꿈꾸며 건립 승려를…
사원은 짠시따 왕(King Kyansittha·1030~1112년 또는 1113년)에 의해 1105년에 세워진 불교 사원이다. 왕은 미얀마를 최초로 통일한 왕이면서 그의 부친인 선왕 아나우라타 (Anawrahta·1014~1077년)가 그 기념으로 1060년에 건립하기 시작한 최초의 불교사원 쉐지곤(Shwezigon Paya)을 1085년에 완공한다.
이어서 왕은 1105년 아난다 사원을 건립하고자 한다. 선왕이 건립하고자 한 쉐지곤 사원이 그랬듯, 아난다 사원의 건립도 싸사나왕사(Sasanavamsa·미얀마 불교연대기)의 옛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왕은 재난에 처한 중생들을 구호하고자 하면서 히말라야산의 수행 도장 난다믈라 동굴(Nandamula Cave)의 이야기를 들려준 8명의 승려에게 바간 평원에 똑같은 사원을 지어주기를 원한다. 건축을 마무리 짓자 왕은 그 사원만이 유일한 성전이 되어 어떤 곳에서도 똑같거나 비슷한 사원이 만들어지지 않길 바라면서 그 승려들을 살해한다. 그 사원의 이름을 아난다로 명명한다.
왕은 승려들을 죽이면서까지 사원의 이름을 산스크리스트의 언어로는 ‘끝없는 지혜’를, 팔리 언어로는 ‘행복’을 뜻하는 아난다(Ananda)로 명명하면서 왕국과 불교의 흥망을 소원했던 것일까? 아니 승려들의 죽음을 동남아 고고학과 역사학 연구자 조지 케이 데스(1886~1969)는 “왕과 승려들은 불교 성전의 수호신으로 봉사하기 위해서 생존했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불상에 중생 구원 염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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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다 사원 내의 벽화. |
출입구를 지나 사원으로 가까이 들어가면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 마하보디 사원(Mahabodhi Temple)의 피라미드형 탑이 황금빛으로 다가선다. 그 황금빛 탑은 450개 이상의 부처 형상이 담긴 피라미드의 탑이 아니라 네 면으로 나누어진 정육면체 위로 세워진 입방체의 첨탑이다. 첨탑에 새겨진 붓다의 형상을 바라보고 그 수를 헤아리자 발걸음은 어느새 네 면의 출입구와 붓다 형상 탑돌이를 재촉한다. 탑을 돌기 전 동서남북의 불상과 그 수인(손짓 모양)을 알고자 안내 책자를 펴니 동서의 불상은 1975년 지진으로 원형을 소실하여 새롭게 형상한 것이며, 남북의 불상은 건립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쪽 가섭불(Kassapa), 북쪽 구류손불(Kakusandha Buddha)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녹야원(Mrgadava)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하여 비구와 불교 교단을 처음 생겨나게 한 ‘법륜 돌리기’의 손 자세를 하고 있다. 그 손짓은 가슴 바로 앞에서 밖을 향한 오른손 및 안을 향한 왼손의 검지와 엄지의 끝을 연결하여 원을 만들고 있는 모양인 다마차카 무드라(Dhammachakka mudra)이다.
동쪽 구나함모니불(Konagamana)은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오른손은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작은 너트 같은 구체(약초 같은)를 들고 있고 왼손은 손등만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불교 조각이나 붓다의 수인에서 볼 수 없는 이 자세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지진 당시에 복구를 하면서 재앙을 맞은 중생들의 고통을 치료하여 불행을 사라지게 하고자 한 소원을 담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쪽 석가모니불(Gautama Buddha)은 오른손을 똑바로 들어 바깥쪽을 향하여 손바닥을 펴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아바야 무드라(Abhaya Mudra)이다. 두려움의 소멸, 평화로움, 자비의 보살핌을 뜻하는 자세를 형상화한 것도 지진 당시 재앙으로 고통을 받고 불행한 삶을 겪고 있는 당시 중생에게 자비를 기원하고자 한 소망을 담은 것일지도 모른다.
■탑돌이와 기도를 마치고
동남서북으로나 북서남동으로 돌든, 탑돌이는 고통(苦)을 멸(滅)하고 집착(執)에서 벗어나 깨달음(道)을 얻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탑돌이를 마치고 정육면체의 출입구에 들어서자 고집멸도의 진리(四聖諦)를 깨달은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그린 자타카(Jataka·본생담)가 플라크(plaques·액자 틀의 명판)로 펼쳐진다. 테라코타(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점토) 타일로 만들어진 547편의 플라크를 둘러 보고 옮겨지지 않는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기도실이다.
‘부처님이 입적하신 뒤이거든 형상을 만들어 설치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눈으로 상상하여 여래께서 생전에 계실 때처럼 꼭 같이 상상하라’(원각경)고 말씀하셨지만 기도실에 멈추어 선 발걸음은 붓다의 자비로 여행도 안전하며 가족들도 안녕할 것이라는 상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붓다의 말씀(體)보다는 그 자비로 멀리 있는 가족과 내일의 여행이 안전하리라는 상상(相)을 하며 기도(用)를 드리고 사원을 나서자 밖에 걸려 있는 ‘사원에서는 몸가짐을 정갈히 하라’는 미얀마어로 된 현수막이 ‘이렇게 나는 빌었다’로 펄럭이고 있다.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