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호텔’(2018)은 어느 호텔을 무대로 두 사람과 방문객 간에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시인 영환(기주봉)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두 아들을 부르고,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희(김민희)는 위로를 받고자 연주를 부른다. 같은 호텔에 투숙한 두 사람은 서로의 지인을 부르지만 대하는 태도는 상반된다. 영환은 방까지 찾아오려는 아들을 만류하며 로비의 카페에서 기다리게 하는 반면, 상희는 연주(송선미)의 방문을 기꺼이 맞아들이며 두 사람만의 사적인 시간을 향유한다. 이 영화의 공간은 호텔 객실의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다. 남자는 사생활 공간에 타인이 들어서는 걸 바라지 않고, 두 여성은 밀실 안에서 내밀한 이야기까지 공유하며 서로 자족한다. 바깥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은 호텔로 온다. 고독 속에 죽음을 기다리든, 오랜 벗을 환영하든 그들에겐 불청객의 시선에 침범당하지 않을 자신만의 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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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변호텔’의 스틸.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에서 ‘풀잎들’(2017)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감독 근작에서 짙어지는 자기반영의 함의를 짚는 일은 쉽다. 도입부의 내레이션부터 실제 삶과 영화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트러뜨리는 의도는 명확하다. 바람이 나 가족을 버린 노작가와 영화감독을 하는 그의 둘째 아들(유준상),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상처 입은 상희의 설정은 실제 감독과 배우의 굴절된 거울 이미지이며, 영화 또한 굳이 이를 감추지 않는다. ‘강변호텔’이 유별난 건 영화적 유언장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죽음에 대한 암시와 강박이 짙어졌다는 점이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래 홍상수는 오랜만에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생애의 만년에 접어든 작가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읊조리는 독백 같은 영화라는 점에서 ‘강변호텔’은 홍상수의 버전으로 일그러진 ‘마다다요’(1993·수필가 우치다 핫켄의 노년을 다룬 영화)의 각색본 같다.
시인 영환은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종종 아들들과는 엇갈린다. 아니, 일부러 비껴나간다. 반면 상희와 연주 두 사람과는 굳이 마주칠 필요가 없음에도 식당에까지 일부러 따라가서 만난다. 죽음을 직감한 영환은 아버지의 자격으로 두 아들과 재회해 오랜 세월의 응어리를 풀고 유언을 남기려는 듯하지만, 결국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부장으로서 남은 일말의 책임감과 도덕률이 아니라, 두 여인으로 표상되는 관능과 욕망의 세계이다.
영화에서 기묘한 부분은 강물의 표현이다. 호텔 카페에서 두 아들과 마주하는 순간 풀 숏에서 유리창 너머로 줄기차게 흐르던 강물은 신기하게도 영환이 상희와 연주에게 추근 거리는 순간에는 얼어붙어 있다. 유동하는 물과 고체화된 얼음, 시간성에 관한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 아들과 마주해 자기 과거의 과오와 무책임함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의 시간은 얼른 흘려보내고 싶지만, 두 여인과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멈추어라, 그대는 너무나도 아름답구나”고 외치는 파우스트처럼 이대로 멈춰있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인가?
‘강변호텔’은 사회적 책무와 시선을 떠나 관능과 유미의 세계로 침잠하고 싶어 하는 한 자유주의자의 독백과도 같다는 인상을 준다. 옳든 그르든 홍상수는 자기 길을 가며, 발길을 멈추는 순간까지 자신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이 영화로 천명한다. 인간의 계몽과 진보를 믿지 않는 그의 냉소는 자신마저도 예외로 삼지 않는다. 이를 긍정하는가 아닌가는 관객의 몫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