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투항한 왜구 상주하고
- 일정한 장소에서 상업도 허용
- 제포·부산포·염포 잇따라 개방
- 가족 거느리고 수천명 거주
- 왜인 무역선박 각 포구에 정박
- 군사기밀 염탐 등 논란 일기도
- 실록 부산포 한자 ‘富 → 釜’ 변해
- 해동제국기에도 삼포 지명 수록
- 광석서 銀 분리·제련 첨단기술
- 16세기 왜관 통해 흘러나가
- ‘은 왕국’ 일본의 탄생 계기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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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류코쿠대학 도서관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내이포, 부산포, 염포’가 표기돼 있다. 김동철 교수 제공 |
■부(富)산포인가, 부(釜)산포인가
‘조선왕조실록’에 ‘부산포’란 지명이 처음 보이는 것은 ‘태종실록’(1402.1.28)의 “동평현 부산포에 왜구가 들어와”라는 기록이다. 이 부산포는 부(富)산으로 지금의 부산과는 한자가 다르다. 지금 쓰는 한자 이름은 ‘성종실록’(1469.12.15)의 “반희가 일찍이 부산포첨절제사가 되었을 때”가 처음이다. ‘부자 부’에서 ‘가마 부’로 바뀌었다. 부산이란 지명은 옛 지도에서도 발견된다. 일본 류코쿠대학 도서관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있다. 아시아·유럽·아프리카가 그려진,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다. 1402년 제작된 원본은 아니고 그 후 그려진 모사본이다. 이 지도에 ‘내이포, 부산포, 염포’가 표기돼 있다. 지도에서는 부(釜)산포로 적혀 있다. 부(釜)산포가 1402년에 기재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釜)산이란 지명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지도인 것은 틀림없다.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에는 ‘웅천 제포, 동래 부산포(富山浦), 울산 염포’를 그린 삼포 지도가 실려 있다. 1474년 1월 제포,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 집 각각 300여 채, 80여 채가 불탔다. 성종은 예조좌랑 남제를 보내, 쌀을 지급해 돕도록 하는 한편, 왜인들의 호구·토지 등을 조사·보고하게 했다. 삼포 지도는 1474년 3월에 남제가 그려온 것이다. 조선의 성곽, 군영, 포구, 왜관, 일본인 마을과 절 등이 표기돼 있다. 부산포를 비롯한 삼포가 묘사된 가장 오래된 지도다.
■1407년 지정된 흥리왜선 정박 포구와 흥리왜인 거주지(왜리, 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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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에 수록된 ‘동래부산포지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한 급선무의 하나는 왜구 해결이었다. 조선은 국방·외교·경제 등 다방면에서 대책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왜구는 점차 줄어들었는데, 투항한 왜구에게는 토지·집 등을 주고 살게 하거나, 일정한 곳에 와서 상업하는 것을 허락했다. 흔히 전자를 향화왜인, 후자를 흥리왜인이라 불렀다. 흥리왜인이 타고 오는 배를 흥리왜선이라 불렀다. 이들의 수는 증가했지만, 이들에 대한 규제는 없었다. 흥리왜선은 경상도 각 포구에 정박해 군사 기밀을 엿보고, 조선인 집에 들어가서 거래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상도병마절제사 강사덕은 앞으로 흥리왜선은 도만호가 있는 곳에 와서 정박하도록 결정해달라는 건의를 조정에 올렸다. 이 건의안은 의정부의 의논을 거쳐 결정됐다. 이 내용은 ‘태종실록’ 1407년 7월 27일에 수록돼 있다.
흥리왜선에 대한 이 결정에 따라, 수군도만호가 있는 내이포(제포), 부산포 2곳이 포구로 지정되고, 그곳에 왜관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사실 1407년에 2곳의 포구가 ‘개항’되고, 왜관이 설치되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때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된 사실만은 틀림없다. 지난달 15일 부산시청에서 ‘부산항 ‘개항 역사’ 시민공청회’가 열렸다. 개항 시기를 종전의 1876년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1407년으로 소급할 것이냐가 논의의 핵심이었다. 1876년을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1407년을 조선에 의한 ‘자주 개항’으로 보자는 것이다. 양쪽의 주장과 논거가 팽팽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1407년이 부산포 개항, 부산포 왜관의 역사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고 있다.
■삼포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섞임·교류가 이루어진 역동적 공간이다
제포·부산포에 흥리왜인이 늘어나고, 왜관에 살러 오는 항거(恒居)왜인이 늘어나면서 많은 문제가 나타났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왜관 부지가 좁아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 1418년 3월 울산 염포와 고성 가배량에 왜관을 설치하고, 항거왜인이 살도록 했다. 그러다가 1426년 ‘제포(내이포), 부산포, 염포’의 3곳 포구로 정착됐다. 이 3곳이 ‘해동제국기’에 지도가 수록된 삼포(왜관)다. 삼포에 살던 항거왜인의 수는 일정하지 않다. 1466년 1650명에서 1494년 3105명으로, 약 30년 사이에 배 정도 늘었다. 일본인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일본인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1494년 수치를 보면, 제포가 80.5%로 절대 다수이고, 부산포 14.6%, 염포 4.9% 순이다.
거주하는 일본인 수로 보면, 제포가 가장 비중이 큰 포구다. 어업을 하거나, 토지를 가지고 농업을 하는 일본인은 대부분 제포에 살았다. 삼포에 사는 일본인의 생활·경제 수준도 차이가 있었다. 제포의 일본인은 호수가 번성하고, 잘 살고, 의복도 아름다웠다. 상대적으로 부산포·염포의 일본인은 가난하였다. 대마도 일본인들은 제포를 ‘낙토(樂土)’라고 여겼다.
부를 쌓은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비싼 이자로 고리대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빚을 받는다는 핑계로, 조선인 집을 밤낮 없이 출입했다. 서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고, 언어·음식·이해관계 등을 같이 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조정·정치·관료·군대·재정 등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인과 결혼하거나 양자·의형제 등을 맺기도 하였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 맺기는 특히 제포의 북쪽 보평역(報平驛)과 부산포의 부산진성 일대에서 심했다. 이곳에는 현지인은 물론 서울의 부자나 상인들도 몰려들었다. 이들은 1~2년, 또는 3~4년씩 머물며 장사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삼포는 상인들의 밀거래 온상이었다.
삼포(왜관)는 조선 속의 이방인 지구로서, 양 국민이 만나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접촉·교역지대였다. 하지만 조정의 입장은 달랐다. “상인이 다른 나라에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듣지 못했으니, 매매가 끝나면 일본인은 즉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왜인은 잠깐 복종했다가 바로 배반”하거나, 항거왜인이 수백 호나 되는 것은 “방안에 뱀을 기르는 것과 같아, 반드시 독을 마구 뿜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걱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1510년 발생한 ‘삼포왜란’이 그것이다. 삼포왜란은 양국의 교린관계를 변질시켰다. 삼포(왜관)의 역사도 이에 따라 변하였다.
■삼포를 통해 일본에 유출된 새 은(銀) 제련술(회취법)
삼포(왜관)를 통한 접촉·교류 속에서 16세기에 양국 경제에 큰 전환점이 된 일이 일어났다. ‘연은분리술’이란 새 기술이 일본으로 흘러간 사건이 그것이다. 1503년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 노비 김검동이 연(鉛) 광석에서 은을 분리·제련하는 새 기술을 개발했다. 재를 이용한 이 기술을 ‘회취(灰吹)법’이라 부른다. 회취법은 개발된 지 오래지 않아 일본에 전해졌다. ‘중종실록’ 1539년 8월 10일을 보면 “유서종이 왜노와 은밀히 통해서, 연철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다”고 나온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였으나, 결정적인 증거·증인을 확보하지 못해, 유서종은 사형을 면하였다. 일본에 전해진 회취법은 이와미(石見) 은광에 적용돼, 일본 은광 개발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다. 이후 많은 은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중종실록’에는 “일본은이 유포되어 (서울)시전을 가득 채운다”, “일본에서 은을 만든 지 10년이 안 되는데, 우리나라에 유포되어 천한 물건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회취법은 조선에서 싹이 텄지만, 꽃을 피운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회취법의 최대 수혜자가 되면서, 이와미 은광 개발은 ‘은 왕국 일본’ 탄생의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
◇ 삼포 항거왜인의 호구·수 |
포구 |
1466년(세조 12) |
1474년(성종 5) |
1475년(성종 6) |
1494년(성종 25) |
호 |
인구 |
호 |
인구 |
호 |
인구 |
호 |
인구 |
제포(내이포) |
300 |
1200 |
308 |
1722 |
308 |
1731 |
347 |
2500 |
부산포 |
110 |
330 |
67 |
323 |
88 |
350 |
127 |
453 |
염포 |
36 |
120 |
36 |
131 |
34 |
128 |
51 |
152 |
계 |
446 |
1650 |
411 |
2176 |
430 |
2209 |
525 |
3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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