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2018)에서 흥미로운 점은 배우들에게서 ‘연기’를 배제한 것이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배우가 어떤 감정을 섣불리 전달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행동과 대사에 꾸밈이 없도록, 간결해지도록 연기에서 힘을 덜어내려 한다. 주인공을 맡은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영화에서 별다른 연기를 하지 않는다. 단지 극 중 라짜로의 역할 그대로 성실하게 노동을 하고 걷고 그 장소에 존재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모든 배우는 각자 맡은 배역에 관해 설명하는 순간 없이,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로르와커는 인물이 관객에게 다가가는 대신, 인물의 시야와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관객이 인물에게 다가가도록 유도한다. 이런 경우 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밋밋해지리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의 영화들이 감정을 지시하고 강요할 때보다 더욱 풍부한 서정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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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라짜로’ 스틸. |
라짜로는 투명한 백지처럼 자신의 감정과 호오를 드러내지 않는다. 티 없이 맑은 얼굴과 짙고 검은 눈동자, 호수의 수면처럼 평온하고 큰 눈은 사람이라기보단 사슴같이 온순한 초식동물의 인상을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겪는 상황,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 어떠한지를 목격한다. 탄크레디 후작 부인은 담배 농장 소작농으로 마을 주민들을 착취하고, 그런 마을 주민들은 라짜로를 노비처럼 부려먹는다. 후작 부인의 아들은 촌동네 인비올라타를 떠나 도시로 가고 싶어 한다. 마을 사람들의 욕망은 지극히 세속적인 사실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의 동기와 갈등은 순진무구한 라짜로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세속적 욕망을 넘어가 있는 존재, 순진무구한 타자의 시선을 통해 일그러진 세속의 풍경을 훑고자 한다. ‘행복한 라짜로’는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사람으로 바꾸고 타비아니 형제가 찍은 촬영분에 펠리니가 간섭해 ‘아마코드’(1974)의 마술적인 순간들을 덧대놓은 영화 같다.
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지만 영화는 실화의 재현이 아닌, 모티브만 따온 한 편의 우화가 되고자 한다. 영화는 라짜로가 절벽에서 추락해 의식을 잃는 장면을 기점으로 나뉘는 2부 구성을 취한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이를 먹었고, 세상은 바뀌어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상이한 두 개의 시간대를 평행선에 놓고 전개된다. 인비올라타에서의 전반부가 전근대적 봉건 사회를 표상한다면, 도시에서의 후반부는 현대 자본주의의 세속이다. 경찰이 개입해 주민들을 풀어주었듯 근대 사회의 도래는 신분제에 예속된 ‘신민’들을 국가(Nation) 안에서 평등한 ‘국민’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계급 해방은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감독은 답한다. 장원에 예속된 농노는 시대가 바뀌어봤자 끝내 도시 하층민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은 결국 새로운 중세일 뿐이다.
주민들은 결코 선량하지 않다. 이들 역시 살기 위해 타인을 착취하고 사기 치길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라짜로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편에 선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추악하며, 어쩌면 사랑받을 자격 따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성취할 수 있는 휴머니즘의 정수가 여기에 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