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2019)과 ‘윤희에게’(2019)를 보면서 두 영화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 대한 호오의 차원에서도 아니다. 서로 다른 감독의 각기 다른 연출이지만, 두 영화는 썩 잘 만들어졌으며, 저마다 목적의식 또한 분명하다. 문제는 영화가 취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다. 페미니즘과 동성애, 두 영화가 각기 다루고 있는 소재와 주제 의식은 현재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지평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일 것이다. 그러나 논쟁적인 발화가 가능한 소재를 다룸에 있어 두 영화에는 미묘한 머뭇거림이 엿보인다. 아니 정확하게는 영화를 세상에 내놓기에 앞서 창작자들이 품었을 두려움의 흔적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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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년생 김지영’ 스틸. |
소설을 영화화함에 있어 빠지기 쉬운 함정을 ‘82년생 김지영’은 영리하게 회피한다. 유년기로부터 쭉 이어져 오는 선형적인 시간 순서를 플래시백으로 재배치하면서 자칫 평이해지기 쉬운 극의 흐름에 점층적으로 진실에 접근해가는 스릴러의 긴장을 불어넣었고, 상황의 분위기와 인물의 감정선에 따라 화면의 색감과 조명의 톤을 조절하는 등 연출의 측면에서 상당한 세공력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배우 정유미의 연기에 밀착하면서 아내, 며느리 그리고 맘충 등 한 사람을 호명하는 다양한 목소리들과 그에 대한 반응들을 담아내는가 하면, 때때로 주변 인물의 눈으로 ‘82년생 김지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점을 취하고 거기에 관객을 끌어들인다. 편리한 이분법적 대립 구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균형감은 영화가 원작을 넘어서는 지점이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에는 영리한 만큼이나 논쟁적 발화 또한 피해가려는 모종의 머뭇거림 또한 보인다. 대현이 보다 이해심 있고 협조적인 남편으로 바뀐 점을 비롯해 다양한 남성군상의 문제적인 모습들이 대거 삭제되었고, 대신 지영을 둘러싼 여성 간의 연대와 가족 드라마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각색되었으며, 직업여성의 경력단절이라는 현실의 무거움은 언제든지 열려있는 복직의 가능성과 문예지 투고라는 다분히 ‘영화적’인 결말에 의해 희석되고 만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과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그린 소설의 날이 선 부분을 일부러 무디게 함으로써 영화판 ‘82년생 김지영’은 상업영화 기획으로서의 안전함, 그리고 ‘대중적으로 수용가능한’ 안에서의 여성주의적 발화라는 한계에 가두어지고 만다.
‘윤희에게’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 어머니이자 급식 조리원으로 살아가는 윤희(김희애)와 일본에서 수의사 일을 하며 고모와 함께 사는 쥰(나카무라 유코) 둘의 일상을 번갈아 보여주던 영화는 차츰 말미에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였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는 감정의 북받침을 가라앉힌 채 차분히 긴 호흡을 유지하는 유장한 멜로드라마의 흐름이 있다. 이상한 건 중년이 된 둘이 해후하는 홋카이도에서의 장면이다. 정작 감독은 두 사람의 해후에 방점을 찍지 않고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가 버린다. 때문에 이 한순간을 위해서 달려온 영화의 감정적 밀도가 일순간 휘발되어버린다. ‘윤희에게’는 동성애 또한 보통의 사랑과 다르지 않음을 전하려 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 절제라기보다는 동성애를 터부시하는 목소리를 피해 무난한 지점에 안착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두 영화의 누그러짐은 현재 한국 사회와 영화가 감당해낼 수 있는 모럴의 임계점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척도와도 같다. 한국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고, 한국 영화는 좀 더 용감해져야 한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