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2019)를 보기 위해 찾은 극장의 아침은 황량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성황리에 상영된 거장의 신작에 배정된 상영관은 한 개뿐이었고, 시간 역시 오전 8시의 조조영화 아니면 심야영화의 하루 두 번으로만 편성되어 있었다. 사실상 영화를 보지 말라는 소리다. ‘겨울 왕국 2’(2019)의 썰물이 빠진 자리에 ‘백두산’(2019)의 밀물이 들이닥쳤다. ‘해운대’(2009) 이래 한국형 대작의 상투적 수사들을 모조리 집어넣다시피 한 이 진부하고 비싼 영화는 개봉 6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1970개의 스크린을 독식한 결과다. 총 128편이 걸린 지금 극장가에 ‘백두산’ 한 편이 상영 횟수 44.5%, 좌석 수 중 50.6%를 차지했고, 그 이외의 영화들은 변변한 관 하나 잡기 힘든 것도 모자라 띄엄띄엄 상영되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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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겨울왕국2’ 스틸. |
관객이 원하는 영화이기에 상영관을 많이 잡는다는 소리가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인위적으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조작한 결과 선택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고, 영화의 다양성과 관객의 선택권은 허울 좋은 명분이자 환상이 되어버렸다. 지금 한국 주류 영화계에 횡행하는 건 100억~200억 원대의 자본을 투입한 대작을 자사 배급망의 와이드 릴리즈로 풀어 한탕을 노리는,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투기 전략이다. 참신함을 원하는 관객과의 소통 능력을 상실한 한국 영화 산업은 웰메이드를 추구한 ‘엑시트’(2019)의 성공에도 교훈을 얻지 못한 채, 구태의연한 흥행 공식을 답습해 이전보다 열화되고 퇴보한 결과물만을 재생산해내고 있다.
장 뤽 고다르의 말처럼 “영화의 경제는 곧 영화의 이념”이다. 블록버스터가 해내지 못하는 비전이 관철되려면 30억~50억 원 중간 규모의 영화 층이 탄탄히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배우가 확보되지 않으면 투자와 배급 자체가 어려운 현재 상황에서 한국영화는 산업의 허리를 잃었다. 독립영화나 소규모 영화사의 저예산 영화들은 어떠한가? 김보라의 ‘벌새’(2018)가 10만 명을 넘긴 건 기적이라 할 만큼 운이 좋은 경우다.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임대형의 ‘윤희에게’(2019),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김경원의 ‘아티스트 - 다시 태어나다’, 정대건의 ‘메이트’, 임태규의 ‘폭력의 씨앗’(2017)은 진중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대중적 소통 능력도 갖춘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출현함을 알리는 수작들이었지만, 철저한 무관심 속에 사장되었다. 영화를 소개할 제대로 된 상영관 수를 얻지 못한 탓이다.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수입된 작품, 그리고 영화제에서 제작 지원한 작품이 산업과의 연계와 공조를 통해 관객과 만나는 건 중소규모 영화 제작사 내지 수입 배급사와의 공생, 신진 감독의 발굴을 통한 세대교체 등 영화산업을 지속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전주국제영화제 대상까지 수상했음에도 정형석의 ‘성혜의 나라’(2018)는 변변한 단관 하나 잡지 못해 별도의 클라우드 펀딩을 추진하고 있다. 작은 영화들에 단 한 개관조차 쉽사리 할당되지 않는, 그로 인해 작가의 등장이 차단되는 이런 상황은 한국 영화 산업에 장기적인 안목이 결여되어있음을 증명한다.
가망 없는 넋두리라는 건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지겹도록 반복되는 스크린 독과점, 10년 넘도록 해결될 기약이 없는 이 해묵은 문제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 ‘기생충’(2019) 이후, 100주년을 넘긴 한국 영화의 미래가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