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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페인 앤 글로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11 19:01:28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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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자유분방하다. 대표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나 ‘그녀에게’(2002) 등에서 익히 보아왔듯, 그의 영화는 웰메이드 상업영화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일 따위에는 관심 없다. 뚜렷하고 선형적인 줄거리, 극적인 전개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관객이 나른하고 늘어지더라도, 그는 단지 하고픈 이야기와 자신만의 리듬에 충실할 따름이다. ‘페인 앤 글로리’(2019)는 한 영화감독의 일상을 따라간다. 거장으로 존경받지만 영화를 찍지 않은 지 오래. 전성기를 떠나보낸 살바도르 말로는 인생의 황혼을 조용히 보낸다. 그러던 중 32년 전 만들었던 영화의 디지털 복원판의 상영과 관객과의 행사를 준비하게 되면서, 살바도르는 과거의 인연과 기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스틸.
‘가장 개인적인 것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이라는 마틴 스콜세지의 말에 알모도바르는 가장 부합되는 감독 중 한 명일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 이래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스페인 감독인 그는 사실 원하는 이야기를 골라 찍는 자유의 대가로 항상 빠듯한 저예산에 시달리는 인디펜던트이다. 그런데도 그의 영화에는 한 점 궁핍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인물 간의 수다는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정신 없고, 영상을 수놓는 색감은 화사하다 못해 현란하다. 이 영화에서는 페르소나 격인 두 배우, ‘욕망의 법칙’(1987)을 찍은 초창기부터 같이한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나쁜 교육’(2004)과 ‘귀향’(2006)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페넬로페 크루즈가 각각 살바도르와 그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반데라스는 이 작품에서 호연해 제72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페인 앤 글로리’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일반적인 드라마 작법을 따르자면 이 영화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한 작가가 다시금 창작의 불씨를 틔우고 재기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려야 했을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그러한 관객의 기대와 통념을 통속적이라며 비웃듯 보기 좋게 비켜나간다. 영화는 주인공 살바도르의 주관을 따라 종합병원처럼 병을 달고 다니는 육신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다가 느닷없이 유년 시절을 환기하는 플래시백이나 꿈으로 넘어가 버리곤 한다. 신기한 것은 두서없고 산만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게 하게 한다는 점이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도 알모도바르는 어김없이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소수자를 그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옷깃에 빗물이 스미듯 인물의 정서에 빠져들며 살바도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쇠퇴하고 풍화하는 육신의 고통, 그에 반비례하듯 아련해지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만큼이나 공감하기 쉬운 테마도 없을 것이다. ‘페인 앤 글로리’는 알모도바르 버전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이미지를 통해서 시간을 복기하는 것이 영화의 본질이라면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의 회한에 찬 자전인 동시에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집필한 프루스트식 영화론(論)인 셈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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