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명제에 한 줄을 덧붙인다. 분명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항상’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 아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낯섦’과 조우하고 나서야 인간은 갑자기 들이닥친 당황스럽고 불편한 것을 이해하고자 사유를 하게 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고장난 망치를 비유로 든다. 벽에 못을 박거나 달군 쇠를 두들길 때, 손 안의 망치는 도구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기에 개별적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루가 빠져 더 이상 편리하지 않게 된 망치는 자명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불편함의 대상이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멀쩡한 망치가 ‘존재했음’을 상기시킨다.
| |  |
|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스틸. |
봉준호 영화는 마치 하이데거의 망치와도 같다. ‘괴물’(2006)에서 괴물은 영화가 시작한 지 15분 만에 갑자기 출몰해 한강변을 헤집는다. 괴물을 소재로 한 영화가 그 정체를 중후반까지 감추고 서서히 밝혀가는 구성을 취하는 걸 떠올리면 장르 안에서 이 구성은 괴물의 생김새만큼이나 기형적이다. 애당초 괴물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감독의 선언. 정작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괴물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어떤 ‘낯선’ 것들, 일상의 층위 아래 감춰져 왔던 한국사회의 공포와 불안을 가시성의 표면 위로 끌어올리고 ‘탈은폐’하는 데 있다. 영화가 겨냥하는 진정한 괴물은 괴물 자체가 아니라, 인물의 대응 과정에서 드러나는 국가의 부재, 제 살길만 도모할 뿐 연대하지 않는 민중과 변절한 운동권 등 침묵 속에 묻어둔 한국사회의 병폐다.
이처럼 ‘사건’을 계기 삼아 불편한 진실에 다가서려는 ‘탈은폐’의 모티브는 일말의 서스펜스를 동반하며 봉준호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마더’(2009)에서 아들이 살인자가 아님을 입증하고자 나섰던 어머니의 탐사는 도리어 약자끼리 서로를 갉아먹는 밑바닥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고, ‘기생충’(2019)에서 성공대로를 달릴 것만 같았던 기우 가족의 사기극은 지하실에 봉인된 비밀의 문을 열어젖히면서부터, 상부 구조에 기생하면서 같은 계급끼리는 투쟁하는 계급적 현실의 역설을 희비극적으로 드러내고 만다. ‘설국열차’(2013)의 말미에서도 주인공 커티스는 첫 칸의 밑바닥을 열고 지하의 기관실에서 부속품처럼 소모되는 계급사회의 실상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면서 문득 봉준호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렸다. 바이러스 확산 못잖게 무서운 건, 이 돌발적 ‘사건’이 들이닥친 뒤 연쇄적으로 터져 나오는 한국사회의 어그러진 풍경들, 당장의 생계유지에 위기를 맞은 서민의 계급적 현실과 민중들 삶의 불안을 파고든 사이비 종교의 실체였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양상은 봉준호 영화가 추구해온 발화의 형식과도 맥이 닿아있다. 우리는 평소에 외면해왔던 우리 사회의 감춰진 진실을 이 파국적 상황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거울을 대하듯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충’의 말미에서 기우의 아버지 기택은 저택의 전등을 깜빡이며 모르스 신호를 보낸다. 무관심한 이들에겐 단지 전등의 고장이겠지만, 신호를 해독할 수 있는 이에겐 위급함을 알리는 ‘존재의 목소리’다. 그 신호에 응답하는 순간부터 위기를 타개할 하나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