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는 재난영화 ‘컨테이젼’(2011)에서 신종 전염병의 출현으로 촉발되는 사회적 혼란을 그린 바 있다. 감염의 공포로 혼란에 휩싸인 군중,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방역 당국의 노력, 군중 심리를 이용해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프리랜서 기자의 출현 등 영화는 여러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가는 군상극의 형태로 거대한 사건의 흐름을 추적해나간다. 발생 가능한 대부분의 상황을 가정한 영화의 과학적 사실성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유행을 예견한 격이 되었다.
| |  |
| 전염병 재난을 다룬 영화 ‘컨테이젼’스틸. |
영화의 핵심은 결말에서야 찾아온다. 다국적 기업의 개발로 숲이 파괴되자 서식처를 잃은 박쥐들이 축사의 돼지들을 감염시켰고, 변이된 바이러스가 인수공통전염병이 되는 일련의 나비효과를 감독은 짧은 시간의 몽타주 안에 함축해 담아낸다. 전염병 재난은 자연발생한 우연이 아니라 인재이며, 무분별한 개발, 공장식 축산을 촉발시킨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자연으로 전이돼 전대미문의 양상으로 치달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과학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의 저술 ‘신기관’에서 학문의 목적은 자연을 정복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과학자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내야 하며, ‘그녀’(자연)를 고문해서라도 복종시켜 인간의 이익과 복리를 증진하는데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도구화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베이컨의 근대적 세계관은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이래 근대 문명을 추동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1997)는 이러한 근대적 세계관의 전형을 잘 드러내준다. 과학기술의 산물인 총포로 무장한 인간들은 이전에는 신으로 섬기고 두려워해왔던 짐승들을 몰아내고 숲을 개간해 제철업을 일군다. 그러나 ‘더욱 잘 살아보기 위해’ 추구한 휴머니즘적 기획은 얄궂게도 비틀린 역운(逆運)이 되어 돌아오고 만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사슴신을 죽인 대가가 거대한 재앙신의 출현으로 돌아왔듯이, 현실의 우리는 ‘컨테이젼’처럼 신종 전염병의 창궐을 맞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의 이면에 깔린 공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라는 근대적 믿음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진실, 그리고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를 추구하며 자연을 닦달해온 현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마침내 한계에 봉착했음을 깨달은데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중국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자 대기가 깨끗해졌다. 관광객이 끊긴 베니스는 물이 맑아져 물고기와 돌고래가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조금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며 자본주의적 삶의 총체를 뒤바꾸는 대안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선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우리 문명의 본질을 성찰하고, 생태계와의 잃어버린 관계망, ‘상호교환 가능한 렌즈’(가타리, ‘세 개의 에콜로지’)를 회복하려는 시도들이 필요하다.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없는 한, ‘자연의 복수’는 또 다른 형태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