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F1963’에 문 열어
- 양조기·재료 현지서 가져와
- 수도원식 ‘필스너 라거’ 제조
- 최고급 사즈 홉이 맛의 비결
- 지역 카페들과 협업 흑맥주 출시
- 버거도 판매… 가족 방문객 북적
- “전통·대중성 두 토끼 잡기 노력”
체코에는 ‘맥줏값을 올리는 나라는 망한다’는 속담이 있다.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전 세계에서 최고인 만큼 체코인들의 맥주 사랑은 역사가 유구하다. 일례로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초대 대통령은 1994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체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맥줏집이자 자신의 단골 펍인 ‘우 즐라테호 티그라(황금호랑이)’에서 열었다.
| |  |
| 프라하993에서 정통 체코 맥주를 만날 수 있다. 매장 내 양조장에서 라파엘 곤잘레스(왼쪽) 수석 양조사와 김민수 양조사가 체코에서 들여온 양조 설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체코 최초의 맥주는 993년 프라하 브레브노브 수도원에서 만들어졌다. 이 수도원의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재현해 체코 맥주를 만드는 곳이 ‘프라하993(부산 수영구 망미동)’이다.
■고품질 보장된 수도원 맥주
| |  |
|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프라하993’의 4종 맥주 샘플러. |
수도원 맥주는 중세시대 유럽 금식 기간에 액체류 외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수도사들이 열량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맥주를 ‘액체 빵’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도사들은 맥주를 양조하는 과정도 수행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방울도 허투루 빚지 않았다. 그래서 수도원 맥주는 고품질이 보장된다.
프라하993은 매장과 양조장이 함께 있다. 매장에 앉으면 유리창 너머로 양조장이 보인다. 체코인 양조사와 셰프가 2016년 문을 열었다. 양조 기계는 체코에서 가져왔고 양조 재료도 꾸준히 체코에서 가져온다. 단, 물은 부산의 물을 쓴다. 부산과 체코의 물 성분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물은 맥주 맛을 좌우하는 주요 요소다. 물이 맥주 맛을 좌우한 대표적인 예가 짭짤하고 신맛이 특징인 ‘고제’ 맥주다. 독일 고슬라르 지역의 고제 강에서 만들어진 맥주라 이름도 고제라 붙였는데, 이 강물은 염분 농도가 높아 맥주 양조를 거치면 특유의 짭짤한 맛을 냈다.
이곳 대표 맥주인 ‘필스너 라거’는 체코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가 많은 맥주다. 체코 필젠 지역에서 유래한 필스너는 탁한 색의 기존 맥주와 달리 맑은 황금빛을 자랑하며 세계 맥주 시장을 뒤집었다. 독일과 상표권 분쟁 등을 거쳐 지금은 체코어로 ‘오리지널’이란 단어가 붙은 ‘필스너 우르켈’로 대중과 만난다. 홉을 많이 사용해 쌉쌀하면서도 꽃이나 풀 향이 느껴지는 게 특징이다. 필스너는 사즈 홉을 넣어 만든다. 사즈 홉은 체코 자테크 지역에서 재배하는 홉으로, 홉 중에서도 최고급에 속한다. 프라하993도 사즈 홉을 사용한다.
지난해 창립 멤버들이 귀국하면서 프라하993의 맥주는 멕시코인 라파엘 곤잘레스 헤드 브루어(수석 양조사)와 김민수 양조사가 맡게 됐다. 이들은 앞서 창립 멤버들에게 전통적인 양조법을 배웠다. 후임자로 발탁된 곤잘레스 헤드 브루어는 “2006년부터 홈브루잉을 시작했다. 맥주를 좋아해서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직업이 됐다. 양조 전에는 필스너를 마시고 작업을 시작한다”고 웃음 지었다. 김 양조사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덕분에 맥주의 주재료 중 하나인 ‘효모’에 능통하다.
■전통 지키며 대중적인 맥주 개발
프라하993은 복합 문화공간 ‘F1963’ 내부에 있다. F1963을 찾는 방문객은 전시와 책 등을 보러 온 가족 관광객이 특히 많다. 프라하993은 맥주와 곁들이도록 체코식 족발 콜레뇨(koleno) 등의 음식을 준비했지만 온 가족이 함께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식사류인 버거나 파스타를 메뉴에 추가해 F1963의 내부 레스토랑 역할을 자처했다. 메뉴 구성에 변화가 생기자 가족 방문객도 부담 없이 프라하993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지난 4월 30일, 프라하993은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흑맥주 ‘에스프레소 스타우트’를 출시했다. 지역 카페 人&BEAN(인앤빈), COULD(쿠드)와 함께 만든 맥주다. 수도원 방식의 체코 맥주를 만드는 곳에서 멕시코·한국인 양조사가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한 맥주를 출시한 것은 이색적인 시도다. 프라하993은 앞으로도 지역 업체와 다양한 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프라하993을 찾는 사람 중에는 체코 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타지 방문객도 많다. 이날 한 방문객은 “필스너 라거가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마셔본 것 중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김 양조사는 “필스너 특유의 쌉쌀한 맛이 부담스럽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며 “맥주는 쓴맛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맛의 층이 있다. 천천히 음미하면 맛의 폭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통 방식을 지키면서도 대중성 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 양조장에서도 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글·사진=김미주 기자 mjki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