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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역사의 암흑 대면한 일본 거장

  • 조휘재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0-11-04 18:45:12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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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까지’(2019)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방송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출장간 한 리포터 요코의 여행을 따라가며 은연중에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내재된 인종차별로 닫혀있는 일본인의 세계관을 비판한 바 있다. 제 25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상영으로 다시 돌아온 기요시의 (6월 경 NHK에서 8K 방송으로 공개했던 드라마판을 극장용으로 재편집한) 신작 ‘스파이의 아내’(2020)는 전작에서 행간을 통해 조심스럽고 암시적으로 드러냈던 정치적 문제의식을 전면에 나타낸다.
   
‘스파이의 아내’ 스틸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즈음인 1940년. 항구도시 고베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후쿠하라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전쟁 중임에도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와 평온한 나날을 살아간다. 사업차 만주로 출장을 나간 유사쿠는 그곳에서 목격한 일본의 전쟁 범죄를 목격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고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남편이 몰래 반입해온 생체실험 일지와 기록 필름을 보게 된 사토코는 그동안 누려왔던 삶의 평안함이 깨질 위기를 맞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과거의 역사를 다시금 스크린에 끌어들이면서 기요시는 우경화 일로를 걷고 있는 현재 일본인과 일본사회의 잠재적 미래가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을 목전에 둔 쇼와시대를 답습하지 않겠는가를 되묻고자 한다.

제77회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의 영광을 안았지만, 사실 ‘스파이의 아내’는 기요시의 필모그래피에서 그리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국가반역죄를 도모하는 남편 뜻에 사토코가 쉽게 동조하는 등 인물의 감정선이 만화적으로 비약하는데, 이 부분은 도리어 사토코에게 고민하는 순간을 부여함으로써 국가에의 충성과 도덕 사이의 딜레마에 처한 인물의 불안과 긴장을 그리는 편이 주제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정서적인 방점을 찍기 위해 필요했을 장면에서조차도 클로즈업을 자제한 연출은 때로는 배우의 연기를 연극연기마냥 어색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스파이의 아내’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근대사의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일본 영화 전반의 경향에서 이 영화는 작은 균열을 일으키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반딧불이의 묘’(1988)에서 ‘8월의 광시곡’(1991)과 ‘간장선생’(1998)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있었던 일본의 무수한 진보 내지 리버럴 경향의 작가들이 강점기 시대 일본을 다루는 방식에는 모종의 합의된 침묵이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부조리와 모순이 불러온 파멸적 결과를 다루고 비판하는 데는 날선 면모를 보이지만, 주로 일본 내지의 피해를 다룰 뿐, 침략에 고통 받던 일본 바깥의 참상을 다루는 데서 망설임을 보이며 암시하는데 그친다는 한계였다.

   
기요시는 이러한 일본 영화의 불문율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최근작 두 편에서 중요한 모티브는 일본의 ‘바깥’으로 나가서 역사의 진실을 ‘본다’는 것이다. ‘세상의 끝까지’에서 요코는 도시를 건설한 일본군 포로의 역사를 대면하고, ‘스파이의 아내’에서 사토코는 남편이 반입한 필름을 영사기로 틀면서 제국의 반인륜적 범죄를 알게 된다. 시대 분위기에 반발하는 정의로운 일본인을 주인공 삼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급진성에는 한계가 분명하나, 역사의 암흑을 대면하고자 하는 정직함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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