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2000)’는 사랑 이야기의 외양을 쓴 시간에 관한 영화, 더 나아가 그리움에 대한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각자의 배우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두 남녀는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다가 뜻하지 않은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헤어진다. 자칫하면 삼류 치정극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한 이야기를 왕가위는 스타일을 통해 극복해낸다. 드라마의 통속적인 군더더기를 들어낸 영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되는 감정의 농밀함을 절제된 대사와 행동의 디테일, 유장한 호흡과 관조의 거리를 갖는 촬영, 탐미적이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장센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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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양연화’ 스틸컷. |
다시 보면서 놀란 건 영화의 공간학적 지형도가 줄곧 폐쇄적인 실내공간 일변도라는 점이었다. 극 중 인물들의 동선은 사무실과 집을 오가고 좁은 복도와 골목, 계단을 오간다. 심지어 두 남녀가 자주 마주치는 실외공간인 건물 바 깥이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Nightstalker’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거리조차 낮이 아닌 밤의 공간으로 폐쇄적 실내공간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실내에서 실내로, 점에서 다른 점으로 향하는 공간의 영겁회귀. 반복되는 일상의 동선 속에서 스치고 교차하길 거듭하며 감정과 인연은 켜켜이 쌓여 나간다. ‘화양연화’의 세계는 마치 미로와 같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어디로 나가는지 출구나 입구조차 알 수 없으며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을 각자의 배우자들은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영화 속 공간은 두서없는 꿈과 같은 몽환적인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그곳은 기억의 공간, 영화를 통해서 재창조된 추억의 장소이다. 1960년대의 홍콩.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만 겨우 숨 쉬고 살아있을 수 있는 사라진 세계. 시간을 애무하듯 유려하게 미끄러지는 수평의 달리숏과 슬로우 모션을 통해 왕가위는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는 파우스트의 외침처럼 안타까운 사랑의 순간을 가능한 한 길게 늘이고 붙잡아두려 애쓴다.
원래 이 영화는 미완의 프로젝트 ‘북경지하’에서 출발한 기획이었다. ‘해피투게더(1997)’를 작업하던 도중 일부 장면을 미리 촬영하고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영화는 중국정부의 검열로 인해 무산되었고, 본래 구상되었던 작가와 요리사, 식료품 가게 주인의 이야기 중 작가의 이야기만이 떨어져나와 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홍콩의 본토 반환이 있었다. ‘열혈남아(1987)’와 ‘중경삼림(1994)’ 그리고 ‘타락천사(1995)’에서 프레임의 일부 구간을 건너뛰는 스텝 프린팅 기법과 핸드헬드 카메라로 이미지의 윤곽을 뭉개고 형해(形骸)화하던 왕가위의 영화적 스타일은 ‘화양연화’를 기점으로 큰 전환점을 맞았다.
‘타락천사’까지의 왕가위 영화가 견딜 수 없는 현재의 시간, 홍콩 반환 직전의 불안감을 떨쳐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면, ‘해피투게더’와 ‘2046(2004)’은 홍콩이란 지리적 토포스를 떠나서도 삶과 역사적 전망은 가능한가를 묻고자 하는 미증유의 탐색이었다. 그리고 ‘화양연화’와 ‘일대종사(2013)’는 각각 홍콩의 한 시절과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왕가위는 항상 멜로드라마를 만들어왔지만 사실은 그 껍데기의 이면에서 홍콩의 역사적 전망을 은유하는 정치적 텍스트로서의 영화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