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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계급타파 이상과 현실…조선의 근대화 좌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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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1-04-07 19:31:27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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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2021)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전(丁若銓·1758 ~1816)이 집필한 동명의 어류도감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출발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집이 가난해 책은 많지 않았고, 비록 손에서 책을 놓지는 않았지만 식견이 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성격이 차분하고 정밀하여, 귀와 눈으로 접하는 초목과 새, 물고기 등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과 이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영화는 흑산도에 유배살이를 온 정약전이 젊은 어부 창대의 도움을 얻어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다룬다. 어엿한 유학자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창대는 정약전의 가르침을 원하고, 정약전은 어부인 창대의 식견에 기대어 작업을 이어나가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는다. 얼핏 보면 ‘자산어보’는 집념어린 한 학자의 인간승리를 그리는 전기영화의 통속성에 매몰될 법하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고간다.

‘아마데우스’(1984)에서 밀로스 포먼이 모차르트를 현대 히피의 선배 격으로 재해석한 것처럼, ‘자산어보’에서 감독은 정약전을 근대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묘사한다. “양반도 상놈도, 서자도 적자도,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 그는 실용지식의 가치에 일찌감치 눈을 뜨고, 신분제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발상을 갖고 있어 “동생보다…더 위험인물”이라 평가된다. 그런 그가 처음 창대를 대할 때 ‘상놈의 자식’을 운운하는데서 미묘한 균열이 일어난다. 머리로는 계급 혁파를 꿈꾸지만, 몸에선 성리학적 계급질서의 습속을 떨쳐내지 못하는 분열증적인 면모. 영화는 정약전을 통해, 선각자이고자 하지만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민중을 위한다면서 눈앞의 민중을 하대하는 지식인 계급의 모순을 보여준다.

모순은 창대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고기잡이일로 생계를 잇지만, 스스로는 성리학적 교양을 갖춘 유림(儒林)이 되는 입신출세를 원한다. 그의 욕망은 일차적으론 반상의 차별이 분명한 수직적 계급 질서에서 사람대접을 받는 양반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돼 성리학적 도덕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정작 과거에 합격하고 목격한 것은 부당한 군포를 부담해야하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양물을 자르는 백성의 현실이었다.(이 대목은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수록된 시 ‘애절양’(哀絶陽)을 재구성한 것이다.) 목전의 참극을 목도하고 나서야 창대는 조선의 국시라는 성리학적 질서가 허상이었으며, 백성이었던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에 빠져있었음을 깨닫는다.

   
‘혈의 누’(2005)에서 제지업으로 섬의 경제를 일으킨 강 객주는 “신분이 아닌 능력에 따라 상하가 정해진다”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의 종이 딸을 넘보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혈의 누’와 마찬가지로 ‘자산어보’는 근대정신의 총아가 막 피어나려던 시기, 조선의 근대화가 어떻게 좌절됐는지 다뤄보고자 한다. 훌륭한 사극의 조건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오늘날과 이어지는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데 있다. ‘자산어보’는 그러한 사극의 미덕을 능히 성취해낸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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