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료 상인에게 성폭행 당한 뒤
- 편견에 맞선 중년여성 삶 다뤄
- “작품 촬영 전에도 기막힌 사건
- 집안 훔쳐보던 男 직접 잡았죠”
- 한국사회 가해자에 유독 관대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좋아해서 자신의 첫 장편 영화 제목은 무조건 ‘갈매기’로 하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던 김미조 감독이 진짜 첫 장편 영화 ‘갈매기’(개봉 7월 28일)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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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체호프의 동명 희곡을 제목으로 하여 장편 데뷔작 ‘갈매기’를 연출한 김미조 감독. 그는 ‘갈매기’에서 평범한 소시민이자 세 자매의 엄마로 살아온 중년 여성이 피해와 복수를 넘어 극복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영화사 진진 제공 |
‘갈매기’는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팔며 일평생 자신을 챙겨본 적 없는 엄마 오복이 동료 상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편견에 맞서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대상(한국경쟁)을 비롯해 각종 세계 영화제에 초청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다 벗어나고 싶은데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오복의 모습이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지만 다시 육지로 돌아와야 하는 갈매기와 닮은 것 같다”며 제목에 의미를 부여했다.
단편 영화 ‘혀’와 ‘혐오가족’에서 여성이 마주하는 폭력을 다뤄온 김 감독은 ‘갈매기’에서는 평범한 소시민이자 세 자매의 엄마로 살아온 중년 여성이 피해와 복수를 넘어 극복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오복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이 사회에 자리하게 된다. 김 감독은 “영화라는 건 자기의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각본을 내가 쓰니까 내가 겪은 일에 관한 인상이 많이 반영되고 여성이 많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이들의 이야기는 내가 치밀하게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며 여성 영화를 연출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김 감독이 ‘갈매기’를 기획한 2018년은 서지현 검사가 촉발시킨 미투 운동이 확산되던 때였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내가 겪은 성추행의 강렬한 기억들이 무의식적으로 모여 ‘갈매기’를 쓰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는 김 감독은 ‘갈매기’ 촬영을 4일 앞두고 당한 기막힌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 “집이 1층이었는데, 2층에서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져서 살펴보니 어떤 남자가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가서 현행범으로 잡았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못된 사진을 찍어오던 사람이었다. ‘갈매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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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스스로를 챙겨본 적 없는 엄마 오복이 성폭행을 당한 후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맞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담은 ‘갈매기’ 스틸컷 |
‘갈매기’에서는 성폭행 피해자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 2차, 3차 피해를 입는, 황당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성폭행을 당한 것은 오복인데 결혼식을 앞둔 딸에게, 그리고 가해자 편에 서는 시장 사람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게 된다. ‘한강에 배 한 번 지나갔다고 생각하라’는 한 시장 상인의 말처럼 유독 성폭력 가해자에게 너그러운 남성 중심적인 우리 사회의 모습도 나타난다. 김 감독은 “잘못을 한 가해자가 직접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 대변하는 걸 뉴스에서 많이 봤다. 가해자는 뒤에 가려져 있고 그를 옹호하는 세력이 감싸주는 것”이라며 “그리고 오히려 피해자를 공격하더라. 그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영화에서 가해자인 기택이 힘이 있고 기득권이라는 이유로 주변 상인들이 그를 두둔한다. 그래서 피해자는 주눅 들고 가해자는 숨어버리는, 부당하지만 엄연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가슴 아프게 그려진다.
“‘갈매기’는 기획 이후 2년 반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열심히 편집을 하면서 누가 봐줄까 했다. 그런데 영화제도 가고 개봉도 하게 됐다”며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다음 작품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김 감독. 그는 “다음 작품은 액션 스릴러 코미디가 뒤섞인 모녀 복수극”이라고 귀띔했다. 주제를 잡고 서사를 풀어가는 능력만큼이나 이를 보여주는 연출력도 뛰어난 김 감독의 다음 영화가 벌써 기다려진다.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