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재휘의 시네필] ‘스펜서’ 왕실이란 감옥에 갇힌, 신경쇠약 직전 여자의 삶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2-04-27 18:54:49
  •  |   본지 14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스펜서’(2021)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여기에는 실화를 다룬다는 명목을 내세운 영화들이 흔히 빠지는 선정주의, 소재의 유명세에 기대어 허술한 만듦새의 변명으로 삼으려는 안이함이 없다. 영화는 다이애나가 크리스마스 연휴의 3일 동안을 왕실의 별장인 샌드링엄에서 보내는 과정을 그린다. 그 기간 벌어지는 사건들은 굳이 실존 인물을 내세우지 않아도 성립될,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현상들이다. 남편의 집안과 불화를 겪으며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다른 게 있다면 그녀의 시집은 전통에 엄격한 영국식 귀족주의의 정점인 영국 왕실이라는 점이다.
영화 ‘스펜서’ 스틸 컷.
다이애나는 별장으로 가는 길을 잃고 당황한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즉 다이애나의 정체성은 길 잃은 사람이다. 목적지 근처까지 왔음에도 다이애나는 농장 한 가운데 선 허수아비를 보고는 허수아비가 입은 낡은 외투를 벗겨 가져온다. 그 헌 옷은 과거 아버지의 것이고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친정 집안의 추억과 현재의 자신을 이어주는 몇 남지 않은 연결고리이다.

결혼 이전의 성이었던 ‘스펜서(Spencer)’를 영화의 제목으로 내세운 이유는 도입부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녀가 찾아 헤매고 돌아가고자 하는 길은 표면상의 목적지인 왕실의 별장이 아니라,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지만 폐허만이 남은 옛 친정의 추억, 자유분방했던 유년기의 삶이다.

어쩌면 그녀는 내키지 않아서 일부러 길을 지체한 것이 아닐까? 과거를 상실한 채 껍데기만 남은 유령처럼 살아가는 다이애나의 쓸쓸한 내면은 황량한 폐가가 된 옛 본가의 을씨년스러운 풍광을 통해 말 없이 전달된다. 반면 차량이 들어서는 순간 부감으로 비춰지는 샌드링엄은 정문 외에는 출구가 차단되어 있는 중세의 성채로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적 종법 질서의 압박과 사방에서 옥죄는 듯한 공간의 위압감으로 단번에 각인된다. 16㎜ 필름 특유의 흐릿한 해상력은 종종 출몰하는 앤 불린의 유령처럼 커튼마저 닫고 죄인마냥 갇혀 지내는 다이애나를 점점 개인성을 잃고 지워져가는 쇠약한 인상으로 담아낸다.

‘재키’(2016)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한 번 현대판 귀족 사회의 내부에 처한 여성상을 다룬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연출은 철저히 계산적이다. 얕은 초점 심도는 인물이 느끼는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단절감과 외로움을 강조하고, 좌우 폭이 좁은 1.66 대1의 화면비는 클로즈업 숏에서 프레임의 남은 여백을 줄여 인물의 얼굴을 우리에 가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와이드 숏조차도 다이애나 비를 둘러싼 주변 공간이 닫혀있음을 매번 확인시키며 포위감을 조성하고, 심지어 야외 장면에서도 밤에 안개를 깔거나 스카이라인을 낮춰 잡는 등 폐소공포증을 일으킬 것만 같은 시각화로 일관한다.

한껏 억눌려있던 다이애나의 감정은 두 아들을 데리고 샌드링엄을 떠나는 영화의 말미에서 비로소 숨통을 트고 해방감을 얻는다. 런던 시가지에서 치킨을 사먹는 사소한 일상이야말로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적당히 바보 같아도’ 용납되는 소시민적 일상의 자유 아니던가? ‘스펜서’는 다이애나의 이름과 일화를 빌려오지만, 실상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과 주인공 노라에 대한 현대적 리메이크이며, 한 개인을 넘어서 억압받는 여성 보편의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2. 2아침기온 경남 7도, 부산 15도…2일부터 쌀쌀해진다
  3. 3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4. 4해운대 벗어나 우리동네로…부산이 온통 극장이네요
  5. 5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6. 6[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7. 7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8. 8‘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9. 9법리 복잡한 지능범죄 급증…“공부해 수사할 엄두 안 난다”
  10. 10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1. 1‘교정시설 조성 지원 특별법’ 발의…부산구치소·교도소 통합 뒷받침
  2. 2부산 국힘 “보좌진 유죄 선고…전재수 시장, 시민에 사과해야”
  3. 3李 “김지용, 친윤 아닌 반윤 검사” 중수청장 청문 요청키로
  4. 4국힘, 중수청 앞서 “범죄자 천국될 것” 여론전(종합)
  5. 5전재수 “생곡 무산 땐 에코델타에 소각장 불가피”
  6. 6軍·유엔사 “군사분계선 이남 지뢰매설, 北 정전협정 위반”(종합)
  7. 7국정원 “우크라가 北포로 송환 비공개 먼저 요청”(종합)
  8. 8‘김종서함’ 울산 진수식 찾은 이재명 대통령 “자주국방이 주권”
  9. 9靑 정책실장에 하준경 수석, 지방시대위원장에 박정현
  10. 10이 대통령 "전작권 환수로 자주국방 마침표"
  1. 1“가덕 공사비 증액 법 개정 앞서 정부 약속부터”(종합)
  2. 2동래 플래그십 문 연 ‘르노’…미래차 R&D센터 내년 오픈
  3. 3신한銀 2만5000명 고객정보 털렸다…당국 조사
  4. 4북극 누빈 아라온호, 항로예측 기틀 마련
  5. 5대선주조 부산 문화 앞장…‘부산국제록페스티벌’ 8년째 후원 행보
  6. 6리사이클링·항만운영·담수화…부산 미래산업 이끌 혁신기술
  7. 7주가지수- 2026년 10월 1일
  8. 8부산 연구개발 우수성과- 우수학술 부문
  9. 9부산 연구개발 우수성과- 연구혁신 부문
  10. 10BPA, 5번째 해외 물류거점 구축…베트남 사업 본궤도
  1. 1“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2. 2아침기온 경남 7도, 부산 15도…2일부터 쌀쌀해진다
  3. 3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4. 4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5. 5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6. 6‘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7. 7법리 복잡한 지능범죄 급증…“공부해 수사할 엄두 안 난다”
  8. 8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9. 9“기관장 인선, 유능하면 지역 불문…산은 유치 채널 총동원”
  10. 10검찰 기존 사건 90일 간 수사 가능…대규모 사건이관에 현장혼선 우려
  1. 1송교창·최준용 빠진 KCC…‘루이스 킹’ 희망될까
  2. 2KLPGA 대회 처음 부산서 여는 HJ重… “지역과 상생할 것”
  3. 3메치고 쏘고…한국 유도·양궁 ‘금빛 데이’
  4. 4돌아온 금빛 주역들, 프로야구 막판 순위·타이틀 경쟁
  5. 5HJ중공업, 8∼11일 KLPGA 챔피언십 대회 주최…부산서 처음 열려
  6. 6해볼 만하다…女축구, 8년 만의 AG 메달 도전
  7. 7중원 황인범·투톱 변화…승리 축포 쏠까
  8. 8아시안게임 사격 남자 속사권총 우승…한국 25번째 金
  9. 9윤규성, 태권도 품새 금메달…한국 남자 개인전 3연패
  10. 10독립운동가 후손 재일교포 허미미, AG 여자 유도 57㎏급 금메달
우리은행
부산 야구장 미래는
야구 없는 날에도 팬·관광객 북적…도쿄돔 일대는 미니도시
부산 야구장 미래는
사직 역사성 있지만 대체구장 부담…북항 돔은 재원 관건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