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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헌트' 배신 당한 헌신…같은 듯 다르다 ‘사나이들의 우정’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2-08-31 18:40:03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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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헌트’(2022)에서 등장인물들은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에서 존 르 카레의 스파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배신자는 가장 신뢰하던 관계에서 발견되고, 역설적이게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는 적이라 여겼던 대상에게서 찾아진다.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의 동지적 관계는 윤종빈의 ‘공작’(2018)에서 흐르던 사나이 간의 뜨거운 우정과 연대에 비교하면 사뭇 차갑고 건조하다. 그러나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처럼 적의 적이라면 잠깐 동안은 손을 잡을 수 있는 법. 신군부의 독재 치하였던 1980년대, 한국 근현대사의 시공간을 배경삼은 이 첩보 액션 활극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고 연이어 안기부가 공을 들이던 침투 작전과 북한 핵 과학자의 망명이 실패로 돌아간다. 내부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판단 하에 안기부는 해외팀 차장 박평호와 국내팀 차장 김정도 두 사람에게 ‘동림’이라 칭해지는 조직 내 첩자를 물색하는 명령을 내린다. 생사람을 범인으로 붙잡아다가 사건을 해결했다고 우기던 ‘살인의 추억’(2003)의 시대답게, 안기부 내부에서 국내팀과 해외팀은 서로를 의심하다 못해 상대측을 동림으로 몰아세우며 대립의 각을 세운다.

직장 내 라이벌 간 갈등처럼 전개되던 이야기는 탐문 과정에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면서 의외의 국면으로 치닫는다. ‘헌트’의 두 주인공 박평호와 김정대는 적대 관계이고 저마다의 정치적 입장이 갈리지만 모종의 공통점으로 연결되는데, 바로 자신이 믿어왔고 헌신한 대상으로부터 배신당한다는 점이다. 남북 간 평화를 꿈꾸던 박평호는 그동안 자신이 수행해온 공작이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수단이었다는 진실에 경악하고, 김정대는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이었지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 현장에 투입되면서 군부 정권에 반감을 갖게 된다.

민족의 구호와 이상은 국가 체제에 대한 반역으로 귀결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은 자국민에 대한 학살과 폭압으로 귀결되는 역사의 얄궂은 아이러니. 민족주의자는 자신이 순진하게 이용당했음을 깨달으면서 분단국가의 대치 현실을 마주하고, 국가주의자는 동포의 목숨을 개의치 않는 국가의 실상에 회의를 품는다. 근대 국가의 내셔널리즘은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는 국민(nation)을 기본 단위로 하여 성립된다. 그러나 분단 현실과 군부 독재라는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양극단으로 기이하게 비틀린 채 갈라지고 만다. ‘헌트’는 현실의 불우 앞에서 덧없이 무너지고 마는, ‘민족’과 ‘정상국가’라는 ‘위대한 환상’에 관한 영화이다. 박평호와 김정대는 한국 내셔널리즘의 이율배반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에서 주된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시대 상황과 장르의 컨벤션, 역사적 상상력을 매끄럽게 연결하며 시대극으로서나 첩보 스릴러로서나 흐름이 끊기고 거슬리는 일 없이, 첨예한 긴장감과 박력을 유지하며 미끄러지듯 달려 나간다. 대중 영화가 역사를 소재주의로 착취하지 않으면서 장르의 매력 또한 놓치지 않는 이러한 경우는 정말 드물고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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