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라 랜드’(2016)로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에 경의를 바쳤지만, 데이미언 셔젤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가 보다. ‘퍼스트 맨’(2018)으로 음악영화의 리듬감을 다른 장르에서도 발휘하는 비범함을 입증한, 그가 다음 작품으로 택한 건 다름 아닌 영화의 역사에 관한 영화. ‘바빌론’(2022)은 일종의 시대극인 동시에 미국 영화사의 텍스트가 되고자 하는 야심 찬 의욕의 산물이다. 감독은 ‘사랑은 비를 타고’(1952) 스타일을 복원하는 작업은 해보았으니, 이번엔 아예 ‘사랑은 비를 타고’의 배경을 다뤄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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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빌론’의 한 장면. |
‘사티리콘’(1969)과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의 후반부를 섞은 듯한 광란의 파티 시퀀스는 금지된 쾌락 탐닉과 성적 방종이 넘쳐나던 시대의 방자한 에너지를 재현하는 데 주력하며 제목이 뜨기까지 장장 30분을 끌고 간다. 스타 배우 존 콘래드(브래드 피트), 배우의 꿈을 안고 초대장 없이 막무가내로 파티장에 들어온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고용된 하인으로 서빙을 하고 있지만 영화계에 진입할 연줄을 잡으려 하는 매니(디에고 칼바). 영화는 세 인물의 걸음을 따라가며 당대 할리우드 풍속사를 재조명한다.
존 콘래드는 무성영화 시대 굴지의 스타였지만 차츰 입지를 잃고 몰락해 요절한 존 길버트를, 넬리 라로이는 자유분방한 이미지와 섹스어필로 스캔들을 몰고 다닌 클라라 보를 각각 모델 삼은 걸로 보인다.
영화감독 루스 애들러는 초창기 할리우드의 유일한 여성 감독 도로시 아즈너를 연상시키는데, 고정된 마이크 위치 탓에 배우 동선이 제약돼 난리가 나는 등, 유성영화 발명으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세세히 묘사됨은 물론이다.(영화에 드러나진 않지만, 이 때문에 도로시 아즈너는 마이크를 낚시대에 달 것을 지시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붐 마이크.)
‘라스트 타이쿤’(1976)의 원형이 된 거물급 제작자 어빙 탈버그와 ‘시민 케인’(1941)에 영감을 준 언론재벌 랜돌프 허스트의 등장 등, 영화는 시대의 디테일을 나열하는 데 더없이 충실하다.
그러나 타락한 문명의 표상인 마냥 할리우드의 추잡한 이면을 들추고 비판적으로 풍자하려던 날 선 면모는 역사의 한 시절을 향수로 끌어안고자 하는 낭만주의와 모순되게 충돌하면서, 영화는 방향을 잃는다. 승승장구하던 넬리의 몰락과 잡부에 지나지 않던 매니가 영화사 간부로 부상하는 과정은 잦은 비약과 생략으로 인해 서사와 감정선의 구멍을 노출하고, 카지노 보스 맥케이를 따라 목격하게 되는 지하의 엽기적 광경은 삭제해도 플롯 전개에 지장 없는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의 결말. ‘시네마 천국’(1988)처럼 중년의 매니가 극장에서 과거를 추억하는 회상신으로 189분의 대단원을 맺을 것 같았던 영화는 갑자기 그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영화들을 끌어오며 급발진하고 만다. 아마도 감독은 영화사 초기의 유산이 현대 영화의 마술을 낳는 토대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싶었겠지만, 등장인물의 감정과 관점, 드라마에서 이탈한 자의식 과잉을 납득하긴 어렵다. ‘바빌론’은 거대한 비전을 펼쳐 보일 듯했지만, 과욕의 귀결은 용두사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