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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공동체적 관계, 삶의 진상

마틴 맥도나 감독 ‘이니셰린의 밴시’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3-04-12 18:43:47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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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절친한 친구이자 이웃이 절교를 선언한다. 하루아침에 돌변해버린 태도에 당황한 당신은 이유를 묻지만,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은 그는 답변을 꺼리고 냉담을 유지할 뿐. 지속되는 갈등은 오해와 불신을 낳고, 양측 모두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해 조용하던 마을에는 피와 죽음의 기운이 횡행한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주인공 파우릭이 가장 아끼는 당나귀와 섬 마을을 걷고 있는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때는 아일랜드 내전 와중인 1923년. ‘이니셰린의 밴시’(2022)는 어제까지 술잔을 나누다 갈라선 파우릭(콜린 패럴)과 콜름(브랜던 글리슨) 두 남자의 운명을 그린다.

켄 로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서 아일랜드 독립과 내전의 시대를 기승전결이 명확한 서사극의 정공법으로 다룬 바 있다. 같은 시기를 배경 삼지만 마틴 맥도나 감독의 접근법은 사뭇 다르다. 그는 사건의 발단과 원인을 밝히지 않고 미스터리한 긴장을 지속함으로써 보는 이가 드라마틱한 사건에 대한 기대를 접고, 대신 마을 풍광과 일상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 상징과 암시에 주의를 기울여 읽을 것을 요청한다.

아일랜드의 수려한 자연풍광을 담아내는 영화의 촬영은 침묵 속에 감추어진, 알 듯 모를 듯한 영화 메시지를 슬며시 드러낸다. 구름을 걷어내고 공중에서 부감으로 내려다본 마을은 구역을 분할하는 돌담 때문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보이고, 절벽 너머 바다의 수평선은 여백을 남기지 않고 화면 상단을 채워 감옥에 갇힌 듯한 답답함을 유발한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폐쇄적인 공동체와 그 심연에 그어진 균열에 관한 이야기이다.

언덕 위에서 마을을 감시하듯 내려다보는 성모마리아상은 망령처럼 마을 곳곳에 출몰하며 죽음을 예고하는 맥코믹 부인과 이미지가 겹치며 불길한 인상을 풍긴다. 아일랜드 전통의 지배 이념은 카톨릭 교회의 봉건적 윤리이고 이니셰린은 보수적인 가치관에 잠식된 마을이다. 신부는 고해성사로 마을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상점 주인은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의 편지를 멋대로 뜯어보고, 경관은 내연녀 살해사건 같은 소식을 떠들어댄다. 마을 질서는 공동체의 평화라는 그럴싸한 명목 아래, 이와 같은 지속적인 단속과 검열을 통해 유지된다.

이러한 촌사회(村社會)에선 지적으로 뛰어난 신여성 시오반은 혼기를 놓친 노처녀로 천대당하고, 음악에 열중하려는 콜름은 괴짜 취급을 받고 따돌림당할 뿐이다. 파우릭은 단교를 선언한 콜름의 집을 무단으로 침범하는데, 그의 행위를 통해 개인이 보이는 독립적인 움직임에 거리낌 없이 가해지는 집단의 억압이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손가락을 잘라내면서까지 관계를 끊고자 한 콜름의 행위는 집안에 진열된 ‘노(能)’극의 가면처럼, 인공적 역할의 가면을 쓸 것을 강요하는 집단에서 이탈해 자유를 찾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콜름에게 자극받은 시오반은 문명과 기회의 땅을 찾아 스스럼없이 고향을 버린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일랜드 내전의 역사에 대한 정치적 환유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고립되고 인습에 침윤된 공동체에서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전체주의 폭력에 관한 우화이기도 하다. “당신의 공동체는 얼마나 자유롭고 개인과 다양성을 존중하는가?” 감독은 관객에게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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