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에 한 사람의 일대기를 온전히 담는 일이 가능한가.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고 갖가지 논란을 몰고 다닌 인물.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렸지만 개발 이후에는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고, 진보적 이념을 지향한 휴머니스트였지만 양육에 불성실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등, 인격적으로 모순된 면모를 보여준 과학자. 남긴 업적의 여파로 오늘날의 인류와 세상에까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어떤 천재적 기인(奇人)의 삶을 손쉽게 미화하거나 전형적인 극의 구도 안으로 밀어 넣고 여과하려는 유혹을 뿌리친 채, 밀도와 긴장을 잃지 않고 3시간의 러닝타임을 들여 다루어야 한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기영화 ‘오펜하이머’(2023)는 그러한 야심의 산물이다.
 |
| 영화 ‘오펜하이머’의 스틸 컷. |
‘오펜하이머’는 극단적으로 다른 화면 톤을 오가며 진행된다. 학창시절과 맨해튼 프로젝트, 1954년, 영화의 중심축인 문제의 ‘오펜하이머 청문회’는 컬러로 그려진 반면, 1959년, 오펜하이머(배우 킬리언 머피)의 몰락을 주도한 정적 루이스 스트로스(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상무부 장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는 흑백영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편집은 시간대의 구분 뿐 아니라, 때로는 동일한 공간과 사건에 처해서도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두 개인이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장치로 쓰인다.
스트로스가 프리스턴 고등연구소로 오펜하이머를 초청해 소장직을 제안하는 순간은 두 번 중첩되며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다. 스트로스의 관점에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실무가와 과학자 양측 간의 괴리감이 강조된다.
오펜하이머의 관점에 들어와서야 우리는 둘 사이에 오갔던 대화의 내용을 알게 된다. 동상이몽(同床異夢).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험담을 하는 건 아닌가에 전전긍긍했지만, 정작 둘은 원자폭탄이 끼칠 사회적 영향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염려를 공유한다.
스트로스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 머리를 굴리며 처세에 매진하는 정치적 인간이라면, 오펜하이머는 현상의 이면에 자리하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 메타(meta)적인 문제를 염려하는 지성인으로 그려진다. 상반된 두 인간형의 충돌, 같은 현상을 바라봄에도 서로 이해될 수 없는 시선의 엇갈림과 어긋남. 오펜하이머의 몰락은 그가 과학자로서의 야망은 있지만, 이상의 실현에 필요한 정치적 수완은 모른다는 순진함과 단순성에서 비롯된다. ‘오펜하이머’는 천재와 범재의 대비를 그린 ‘아마데우스’(1984)의 정치적 재해석이다. 또한 영웅으로 추앙받은 개인이 경력의 정점에서 추락하고, 자신이 거둔 성취로 인해 도리어 고통받으며 스스로가 운명의 톱니바퀴 부속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아 가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현대적 변주에 다름 아니다.
천문의 이치를 읽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는 정작 발밑의 도랑을 보지 못해 걸려 넘어지고,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힘은 저열한 속물과 광인(狂人)들에게 쥐어진다는 현실의 얄궂음이란. 단언컨대 ‘오펜하이머’는 위대한 영화이다. 건축적으로 구조화된 영화의 형식적 엄격함, 기교의 정밀함을 추구해온 놀란의 영화적 화술은 감정의 뿌리를 흔드는 숭고의 지경에 도달하고, 인류 역사의 좌절과 실패에 깔린 비극적 아이러니의 근원을 건드리는 통찰에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