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호의 ‘하얼빈’(2024)은 기능적이다. 정해진 각본대로 안중근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역할에 머물 뿐 그 이상이 없다. 영상을 배우의 대사와 표정을 담아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만 다룰 뿐, 예술적 잉여를 창출하고 감정을 고양하는 지점까지 이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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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얼빈’의 한 장면. |
독립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떳떳하게 빛을 받으며 침대에서 편히 잠들 수 없다는 듯 방 한구석 그림자에 숨은 채 괴로워하는 안중근의 모습 등, 몇몇 장면은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상주의자 청년의 내적 심리를 드러내는 데 꽤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상은 순간에 그칠 뿐, 영화 전체를 곱씹어볼 지속적인 잔상은 남지 않는다.
‘남산의 부장들’(2020)에 이어 ‘하얼빈’에서 감독은 다시금 결말이 정해져 있는 역사적 사건을 운명의 소실점으로 삼고는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첩보극을 펼친다. ‘마약왕’(2018)에서 한 인물의 연대기 전반에 걸친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두서없이 나열하면서 산만해진 플롯의 구멍을 노출했다면, 그와는 반대로 시간대를 압축하는 구성을 취함으로써 극의 밀도를 유지하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이건 발전이라기보다는 단점을 최소화해 나아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편법이자 착시효과에 가깝다.
배우의 얼굴과 연기를 담는 기능에 그치는, 평이한 선을 넘어 무감각한 샷과 리버스 샷의 반복은 이미지의 낭비를 낳는다. 만약 안중근의 저격이 극적으로 큰 감정적 충격과 울림을 자아내려면, 우선 저격 대상인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연출이 필요했을 것이다. 메이지 정부의 실권자가 가진 권력의 크기를 시각화하기 위해선 주변을 둘러싼 군중 이미지의 위압감, 호사스러운 미장센 가운데를 걸어가는 왜소한 노인의 대비를 이동촬영으로 포착했을 법하며,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하는 정략가의 노회한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선 릴리 프랭키의 연기에 실린 세부적인 뉘앙스를 포착하는 정밀한 클로즈업과 더불어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좀 더 늘려야 했다.
안중근의 최후 또한 사형대를 오르는 한 걸음마다 실리는 묵직한 무게감, 비장함을 끌어낼 연출의 안배가 필요했다. 그러나 감독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멀뚱히 서서 연극무대를 비추는 식의 평면적인 풀샷, 현빈의 근사한 얼굴이 안중근 역에 덧씌워짐을 과시하는 의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정면 클로즈업 등으로 안이하게 임한다. 장면에 들어가면 인물의 동선이 생생하게 재현된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프레이밍과 컷의 연결을 여기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영화의 연출 호흡이란 대개 이런 식으로, 물적 규모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딱히 전달할 의도랄 것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필름 누아르를 방불케 하는 극단적인 명암 대비에 차갑게 가라앉은 톤과 색조, 과감한 와이드 앵글로 할리우드 고전기 영상미학에 닿고자 하는 홍경표 촬영감독의 역량이 추락 직전에 간신히 붙잡은 생존의 동아줄일 따름이다. ‘하얼빈’은 내러티브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급급한 나머지, 극에 정서적인 에너지를 더하지 못한 채 전시적 기능성으로 겉도는, 오늘날 한국 상업영화 영상 문법의 문제를 여실히 증명한다.